

자유 연재
사랑했던 연인이 자신을 배신했다 여겨 등을 돌린 백영은, 그녀를 잃고 난 후에야 제 모든 선택을 후회한다. 결국, 자신의 영혼을 대가로 시간을 되돌려 그녀를 살려내는데. [혹여 네가 날 원치 않아도, 혹여 네가 날 거부하여도. 이제 두 번 다시 난 널 포기하지 않겠다. 놓아주지 않겠다.] 그녀의 손목에 새겨진 문장은 두 사람을 다시 이어줄 것인가. *** 그녀를 담은 그의 청회색 눈이 속절없이 달아올랐다. 손 대고 싶다. 부풀어 오른 볼을 감싸고 앙증맞은 입술에 입 맞추고 싶다. 정상적인 시간의 궤도를 벗어난 탐욕이 그의 심장을 맹렬히 들끓게 만들었다. 그러나 인내심 또한 그의 또래가 가질 것은 아니라, 그는 치밀어 오르는 본능을 다소 난폭한 방법으로 분출해 버렸다. 파삭. “...아?” 갑작스런 소음에 근원을 찾던 소윤은 백영이 쥐고 있던 상의 끄트머리가 부서져 있음을 발견했다.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뜨자 백영이 여상히 말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낡아서 버릴 때가 됐나보지.” 그녀에게 고정 돼 있는 시선의 온도와는 전혀 다른 그저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1화.
너를 놓쳤다. 너를 등지고 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그래선 안 됐었다는 걸, 널 잃고 나서야 알았다.
널 웃게 만들 이는 나여야만 했다. 널 울릴 수 있는 이도 나여야만 했다. 네가 숨을 거두는 날 네 곁을 지키는 이도 나여야만 했다.
그러나 넌.
내가 없는 곳에서 웃고, 울고, 살다가,
외롭게 숨을 거뒀다.
그래서 난.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널 되찾으려 한다.
혹여 네가 날 원치 않아도, 혹여 네가 날 거부하여도.
이제 두 번 다시 난 널 포기하지 않겠다. 놓아주지 않겠다.
내 삶을 되돌려, 네 삶을 되돌려, 시간을 되돌려.
난 널 갖겠다.
기필코 갖고야 말겠다.
* * *
생을 마감하는 순간,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어느 한때를 회상하며 후회한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상황을 곱씹고, 선택을 곱씹고, 안타까워한다. 특히 비극이라 할 만한 삶을 살았던 이라면 당연히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유씨 가문의 소윤. 그녀의 길지 않은 인생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는 참으로 알기 어렵다.
본가에서마저 잊힌, 유가 방계의 가난한 집 딸이었던 것이 문제였을까.
혹은 꼬박 이 년을 만나고서도 제 가문조차 밝히지 않았던 연인 주백영, 그와의 만남이 문제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왕궁에서 우연히 적화문 당주 진이헌의 눈에 띄어버린 것이 문제였을까.
어쨌거나 그녀가 제 삶에 일어날 크고 작은 사건들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주 조금이나마 앞날을 내다볼 기적 같은 힘이 주어졌더라면.
그녀의 초라한 집에 진이헌이 방문한 날, 대접할 것이 없어 곡주 한 병과 함께 떠밀려 들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연인도 정혼자도 아닌 낯선 사내의 품에 안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삼단 같은 머리칼을 잘라 팔아서라도 그 한 밤 대접할 푸짐한 안주상 정도는 준비해 뒀을 테니까.
그랬더라면 그 밤의 일로 말미암아 배신당했다 여긴 연인 주백영의 분노와 눈물을 견딜 필요도, 대가문의 첩실이 되어 수난을 당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 밤을 피했다고 하여 그녀의 삶이 크게 달라졌으리라곤 확신할 수 없다.
당시 그녀의 연인이었던 주백영은 그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얕잡아 보고 있었다.
천천히 쌓아 올렸던 연정(戀情)이, 조만간 건네주려 주머니에 넣어 다니던 옥가락지가 제게 어떤 의미인지, 그는 몰랐다.
그는 제가 도성을 떠나 있던 몇 달 사이 다른 사내의 것이 된 소윤을 이해하지도, 용서하지도 못했다. 그녀의 탓도 아닌 과실을 끌어안지 못했다.
당장에야 괴로워도 한낱 여인 하나, 잊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렇기에 그녀를 잃은, 참으로 어리석은 남자였다.
그러니 그들의 관계가 유지되었다 한들 결말이 어찌 되었을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그렇게 연인은 헤어졌다.
‘괜찮으니 내게 와라’, 그 한마디를 하지 못하여 주백영은 그녀를 놓쳤고, 그녀는 정인(情人)을 배신한 죄인으로 영영 그의 뒤에 남았다.
적화문의 당주는 하룻밤의 응대를 잊지 않고 소윤을 첩으로 데려갔다.
집안의 형편은 이로 인해 매우 좋아졌으나, 차마 기뻐하기 힘든 결말이었다.
대부분의 사내는 자신의 것이 된 여인에 대해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다.
앓느라 침상을 벗어나지 못해도, 귀한 음식들로 신경 써 올리라 아랫것들에게 당부하며 의원을 보내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물론 증세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지기 전에 일을 되돌릴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문의 의원이 누군가와 공모하여 자신을 말려 죽이려 한다는 것을 소윤 또한 어느 정도 눈치챘기 때문이다.
피임을 위해 올리는 것이라 한 탕약을 들기 시작한 이래로 건강한 육신이 쇠약해졌을 뿐 아니라, 아무리 증세가 심해져도 고뿔이란 소리만 거듭하는 의원의 대처가 정상일 리 없었다.
아버지의 관직에서부터 시작하여 받은 재화가 적지 않다는 점이 송구하여 마냥 침묵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당주 이헌에게만 알렸더라도 소윤은 살 수 있었다. 하나뿐인 제 여자의 말을 안 들어 줄 리 있겠는가.
실제로 그녀가 죽은 후, 진이헌은 그녀의 죽음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연루된 이들을 모조리 밝혀내 피바람을 일으킨 탓에 온 나라가 떠들썩해질 정도로 분노했었다.
분노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그 정도의 대처야 예상치 못했더라도, 소윤은 진이헌이 자신을 외면치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윤은 입을 다물었다. 끝까지 제 병세를 알리지 않고 기회를 흘려보냈다.
진이헌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더라도 그녀에겐 한 번의 기회가 더 있었다.
숨을 거두기 한 달 전쯤, 옛 연인 주백영이 적화문을 찾았기 때문이다.
외진 별채에서 죽은 듯 지내는 그녀였으나 소식을 들은 그 날엔 비복의 옷을 빌려 입고 기어코 그를 만나러 나왔다.
얼굴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신의를 저버린 일을 사죄하였던 이별의 날 이래 첫 만남이었다.
그러니 그에게 마지막으로 어여쁘게 보였으면 하는 마음이 없진 않았다.
2025.10.24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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