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되도록 얽히지 말아요. 뒷소문 안 좋으니까.’ 아름다운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 소문들이 납득될 만큼. “한수혁입니다.” 하지만, 남자의 이름을 듣자마자 소름 끼치는 두통이 세경의 머릿속을 후벼 팠다. ‘죽어, 죽어!’ 그가 언니를 죽인 범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세경은 그를 바닥으로 추락시킬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짓이라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게 설령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라 하더라도. “안기고 싶어서 온 거예요, 저.” “내가 어떤 놈인지는 잘 알지 않나.” 지금이 그에게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절대 놓칠 수 없었다. “그럼, 어디 한 번 알아서 안겨 봐요. 나는 그런 게 취향이라.” 노골적인 명령에 흠칫하기도 잠시, “너 안 해 봤지, 이런 거.” 입가에 서린 위험한 미소에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더는 얽히면 안 되는 남자라고.
1
prologue
“임세경 씨, 촬영장 세팅 완료됐어요. 준비 마치시는 대로 나오시면 됩니다!”
조연출의 외침을 기점으로 안 그래도 어수선하던 대기실 내부가 숫제 전쟁통이 되었다. 세경을 둘러싼 스태프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흠 없는 여주인공을 빚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다.
이미 1시간 넘게 매달려 완성한 메이크업과 헤어를 다시 손보는 사람들 속에서, 세경은 큰 눈을 내리깔았다. 자신의 모습이 눈부시게 세공된 진주같이 반질반질 가꿔질수록 양심이 깎여 나간다. 스태프들의 모든 노력은 허무한 물거품이 될 것이기에.
“토슈즈 좀 신겨 드릴게요.”
잠시 딴생각에 빠진 틈에 어린 스태프 한 사람이 토슈즈를 들고 다가왔다.
“아…….”
여기서 몸을 움직이면 수십 명이 매달려 마무리해 놓은 노력의 결과가 흐트러질 것이다. 그건 민폐였다.
하지만…….
세경은 몇 초간 망설이다가 스태프를 만류했다.
“죄송한데 저 주실래요? 토슈즈는 제가 직접 신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진짜 춤을 춰야 하는 거여서요.”
“아, 맞네요. 신는 방법이 따로 있으시겠구나.”
스태프가 토슈즈를 세경의 손에 넘겼다.
세경의 손가락이 토슈즈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석고와 나무의 단단한 무게감과 그 위를 감싼 살구색 새틴의 매끈하고 서늘한 감각이 익숙하게 감겨든다.
한때는 이 아름다운 무용화가 제 운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어리석고 이기적인 맹신이 언니를 죽이고 오빠를 자살로 몰고 갔다. 제 토슈즈는 가족들을 박살 낸 끔찍한 흉기다.
처음부터 신지 말았어야 했는데.
세경은 부질없는 후회를 하며, 발레 유망주 시절부터 현역 때까지 늘 들고 다니던 낡은 가방에서 익숙한 플라스틱 통 하나와 살색 테이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허리 숙여 발로 두 손을 뻗었다.
발레는 발끝을 혹사시키는 무용이다. 춤추는 내내 양발은 낭만적인 토슈즈 안에 숨겨진 채 기괴하게 꺾이고 짓이겨진다. 발톱이 멍들거나 깨지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발과 토슈즈 사이에 무언가를 대는 작업이 꼭 필요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는 아픔을 견디기 위해 할머니의 냉파스를 발끝마다 조각조각 붙이고 발가락들을 거즈로 감았었는데, 발레단에 입단하고는 보호와 진통 효과가 있는 전용 실리콘 패드와 테이프를 사용했다.
하얀 통에서 젤로 된 반투명한 패드들을 꺼내 양쪽 엄지발가락과 둘째 발가락에 붙이고 테이핑을 하는 손짓은 능란했다. 테이프까지 꼼꼼히 감은 발끝에, 토슈즈로부터 발을 보호해 주는 초승달 모양의 말랑한 토싱을 끼우면 준비가 끝난다.
“토슈즈 신으시는 걸 눈앞에서 보다니, 신기해요.”
곁에 쪼그려 앉아 지켜보던 스태프가 감탄 어린 말을 뱉었다.
세경은 순식간에 신은 토슈즈의 리본을 정리하면서 스태프를 쳐다봤다. 시선이 맞닿자 스태프가 수줍게 입을 열었다.
“저 사실 세경 리나님 찐팬이었거든요. 국립 발레단 계실 때 언니 무대 보려고 피켓팅 참전하고, 취소 표 줍겠다고 새벽마다 예매 사이트 들여다보고 난리도 아니었다니까요. 이렇게 같이 일하게 돼서 진짜 영광이에요.”
세경을 초롱초롱 바라보는 눈빛이 보석 알 같다.
세경은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입술을 감쳐물었다.
무대 위에 오르면 저를 갈망하는 저런 눈빛들이 수천수만 쌍이었다. 세경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보석들이 자신으로 인해 반짝이는 그 순간을 목숨처럼 사랑했다.
발레 무대를 저버린 뒤로는 다시는 그런 보석들을 만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의 공간에서 마주쳐 버렸다. 곱게 접어 묻어 두었던 발레에 대한 열망이 꿈틀거린다.
세경은 힘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가족들의 복수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마당에 이런 미련이라니. 스스로가 한심했고, 의심스러워진다. 자신의 발이 금방이라도 모든 계획을 철회하고 무대로 달려가 버릴 듯하다.
아무래도 어설픈 부상으로는 안 되겠다. 다신 감히 춤출 생각 같은 건 하지 못하게, 완전히 꺾어야지.
세경이 토슈즈를 신는 것은 오늘로 마지막이다. 사실 잠깐 춤출 땐 패드에 테이핑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후회 없이 발레를 버릴 생각에 굳이 완벽히 갖춰 신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영영 보내 줄 때 정성을 다해 염습하듯이.
“고마웠어요.”
세경이 눈을 부드럽게 여닫으며 스태프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오늘 잘하실 거예요. 파이팅!”
스태프가 부끄러워하면서도 두 주먹을 야무지게 쥐어 든 채 세경을 응원했다.
세경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체하고 공연히 대본을 바라봤다.
「오직 한 사람만 바라보는 시선은 반쯤 실명된 것이나 다름없다. 세상에 그 사람만 존재할 뿐, 다른 것들은 전혀 볼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후시 녹음을 해야 한다는 내레이션 대사가 눈에 들어왔다.
세경의 몫이나, 읽을 일은 없을 것이다.
세경은 바로 시선을 돌렸다.
2025.10.28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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