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녹음부스 안, 붉은 불빛 하나가 켜진다. 그 안에서 성우 나애진은 언제나 완벽했다. 음 하나, 호흡 하나까지 조율된 프로페셔널이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수많은 밤을 달궜다. 남자들이 그 소리에 숨을 죽이고 음색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헤드폰 너머로 애진을 상상했다. 입술이 닿는 소리, 얕은 숨, 미세하게 떨리는 웃음을. 목소리 하나로, 수백 만개의 욕망이 완성됐다. 그런데 정작 애진은 단 한 번도 침대 위에서 절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대본을 따라 숨을 내쉬고, 연기를 흉내 내며 살아왔을 뿐! 녹음이 끝나면 애진은 늘 자신이 비어가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날은 조금 달랐을지도. 갓 들어온 신입 디렉터, 정이도가 고개를 들었다. 차분한 눈빛으로, 마치 제 속을 들여다 보듯 말했다. “성우님, 한 번도 침대 위에서 느껴본 적 없죠?” 모욕이라기엔 이상할 만큼 담백 혹은 담담했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넘기려 했지만,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일로 시작된 레슨 이후, 느끼지 못하던 여자가, 자신의 소리에 스스로 젖어든다. ‘프로’였던 성우가 ‘여자’로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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