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 글링
“그 남자는 내 거야, 언니가 뺏어가도록 두지 않아.” 그 목소리는 독처럼 천천히 스며들었다. ‘아니야…! 난…! 난….’ 숨이 가빠지고 시야가 번져가는 와중에 멀리서 문이 열리는 게 보였다. 누군가 걸어 들어왔다. 저벅, 저벅, 낯익은 구둣발 소리. 눈이 흐릿하지만 그럼에도 남자의 모습은 이상하리만치 또렷하게 보였다. 인간이라 하기엔 너무 완벽했고 마냥 아름다움만을 칭송하기엔 어딘가 잔혹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방안에 맴도는 어둠보다 더 칠흑 같은 머리칼을 가진 그가, 루비와 같은 한 쌍의 눈동자가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순간, 남자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황홀하고 꿈결 같은 미소. 그 미소를 눈에 담으며 나의 의식은 천천히 가라앉았다.
프롤로그
우르르 쾅—!
하늘이 무너져 내릴 듯 천둥이 울려댔다.
잠시 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인지, 심장이 두근대는 소리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빗방울이 거세게 쏟아졌다.
젖은 창문 틈으로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다.
어두운 거실에 일렁이는 벽난로의 불빛이 무색해질 만큼 방 안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카밀라는 커다란 창문 앞에 서 있었다.
길게 늘어진 짙은 갈색 머리카락은 창밖 어둠과 뒤섞여 한층 더 어두워 보였고, 가느다란 손끝이 창틀을 더듬는 움직임은 기묘하리만치 조용했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무게를 잡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다 최근 어린 나이에 사고 친 귀족 영애의 사건이 떠올랐다.
‘카밀라, 너… 혹시 사고 쳤어? 임신이라도 한 거야?’
하지만 누군가 입이라도 틀어막은 것처럼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 카밀라가 입을 열었다.
“언니… 혹시 기억나? 우리 어릴 적, 열흘 내내 눈이 내렸던 날 말이야.”
혼잣말처럼 가볍게 내뱉은 목소리였다. 대답을 듣고 싶진 않았는지, 카밀라는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
“나 있잖아, 겨우 행사에 쓸 자수가 완성돼서 들떠있었어. 내가 아버지께 칭찬받으려고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언니도 잘 알았을 거야. 잠을 줄여가며 매달렸으니까. 하지만… 그날, 언니는 아팠지.”
나는 얼핏 온 세상이 새하얗게 변했던 그날이 떠올랐다. 매우 춥고도 뜨거운 날이었다.
펄펄 끓는 열기는 식을 줄 몰랐고, 기침은 연신 터져 나오는데 이불을 걷으면 뼈가 시릴 만큼 추웠었다.
“분명 그날은 나의 날이었어. 하지만……결국 집안의 모든 관심은 언니에게 쏠렸지. 신기하게도 언니는 항상 그런 식이야.”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카밀라의 옆얼굴은 무표정했다.
비에 젖은 유리창 너머, 어두운 정원을 바라보는 눈동자엔 감정이 없었다.
그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항상 어딘가가 모자라 보일 만큼 헤픈 웃음을 흘리던 애였으니.
콰쾅!
천둥이 다시 하늘을 찢었을 때, 순간 드러난 그녀의 옆모습은 희미한 빛조차 맺히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언니는 아주 손쉬운 방법으로 모두의 관심을 얻어내. 부모님의 사랑도… 사용인들의 존중도….”
그저, 내게 꾹꾹 눌러 담은 말들을 내뱉을 뿐이었다.
“그렇게……다 가졌는데…….”
순간, 카밀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모든 걸 다 가졌으면서…….”
그리고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핏발이 선 눈동자.
그 안엔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를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무표정한 얼굴에 깃든 건 오직, 분노였다.
“나에게 하나뿐인……그마저도 뺏어가려고?!”
비명처럼 터진 외침과 함께 그녀는 감춰둔 단검을 휘둘렸다. 미쳐 생각할 겨를도, 움직일 틈도 없었다.
숨이 턱 막히고 피가 튈 때까지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줄도 몰랐다.
이윽고 가슴에서 미칠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몸은 크게 휘청이며 바닥으로 무너졌고 세상이 기울었다.
뺨에 닿은 바닥이 너무도 차디찼다.
딱, 딱,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
카밀라의 시선은 미동도 없이 나에게 고정돼 있었다.
마치 끝을 확인하듯, 차갑고 침착한 눈이었다. 그 옅은 갈색빛 눈동자엔 후회도, 슬픔도 없었다.
그저 해방감만이 느껴졌다.
지독할 만큼 후련해 보이는 얼굴.
나의 죽음을 오래도록 기다려온 사람처럼 희열에 찬 표정이었다.
“난… 오래전부터 언니가 눈엣가시 같았어. 항상… 사라지기만 바랐지….”
‘대체 왜…?’
입술이 움직이지 않는다.
의식은 가라앉았고 목구멍은 피로 가득 찼다.
내뱉은 소리는 머릿속에서만 맴돌았다.
아무리 외쳐도, 아무리 물어도 목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카밀라는 내게 조용히 걸어왔다.
무릎을 꿇듯 자세를 낮추더니 그녀는 나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 남자는 내 거야, 언니가 뺏어가도록 두지 않아.”
그 목소리는 독처럼 천천히 스며들었다.
‘아니야…! 난…! 난….’
숨이 가빠지고 시야가 번져가는 와중에 멀리서 문이 열리는 게 보였다.
철컥. 누군가 걸어 들어왔다.
저벅, 저벅, 낯익은 구둣발 소리. 눈이 흐릿하지만 그럼에도 남자의 모습은 이상하리만치 또렷하게 보였다.
인간이라 하기엔 너무 완벽했고 마냥 아름다움만을 칭송하기엔 어딘가 잔혹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방안에 맴도는 어둠보다 더 칠흑 같은 머리칼을 가진 그가,
루비와 같은 한 쌍의 눈동자가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순간, 남자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황홀하고 꿈결 같은 미소.
그 미소를 눈에 담으며 나의 의식은 천천히 가라앉았다.
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빠르게 뛰던 심장은 조용히 멈추었다.
* * *
“헉—!”
비올레타는 폐가 조여드는 거친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젖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뺨에 들러붙었고 사정없이 떨리는 손끝은 하염없이 이불 위를 더듬었다.
“허윽…”
가슴을 꿰뚫던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살갗을 가르며 들어오던 검날의 감촉은 여전히 심장 언저리를 맴돌았다.
“헉… 하…”
그녀는 가슴께를 더듬다가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은 두 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천천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 손으로 얼굴을 묻었다.
“빌어먹을…….”
짜증 섞인 중얼거림이었다.
회귀한 뒤로 꾸준히 과거의 악몽이 따라붙었다.
분명, 자신은 죽었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다시 눈을 떴을 땐, 그 일이 벌어지기 석 달 전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끔찍한 악몽을 꿨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회피할 수 없는 일들이 연달아 벌어졌다.
첫날엔 하녀가 흘린 잉크병의 위치가 기억과 완벽히 일치했고
둘째 날엔 식사 중 하인의 실수로 어머니의 드레스가 와인에 젖었다.
셋째 날엔 티파티 초대장이 도착했다. 그리고 봉투 뒷면의 오탈자까지 전생과 똑같았다.
처음엔 기시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반복될수록 명확해졌다.
그녀는 과거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긴 예지몽을 꿨거나.
“하….”
머리를 짓누르던 감각이 조금씩 가라앉자, 비올레타는 숨을 몰아쉰 채 몸을 일으켰다.
희미한 새벽빛이 커튼 틈을 비집고 들어와 방 안을 물들였다.
그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탁자 위에 있는 손거울을 들었다.
식은땀에 젖은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눈가엔 피로가 선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예뻤다.
너무도 예쁘게 태어났고 그것이 문제였다.
비올레타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흐트러진 모습도 아름답네, 비비.”
기분이 가라앉을 땐 예쁜 것을 보면 조금 나아졌다.
그런 의미로 언제든 아름다운 걸 볼 수 있는 자신은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거울을 내려놓은 비올레타는 조용히 문을 열고 바깥 복도를 내다보았다.
땀을 잔뜩 흘렸기에 목욕을 하고 싶었지만 아직 새벽녘이라 적막했다.
그녀는 발소리를 죽이고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하녀들을 깨우는 것도, 종을 울리는 것도 귀찮았다.
비올레타의 발길은 저택의 안쪽, 별채와 연결된 곳으로 향했다.
가문의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는 목욕실이었다.
상아색 대리석으로 마감된 목욕실은 천장이 높고 창이 없는 구조였다.
방 한가운데엔 욕조라기엔 너무 큰 타원형 온수탕이 깊게 파여 있었다.
섬세하게 조각된 용머리 장식 아래로는 미지근한 물이 흘러들고 있었다.
비올레타는 망설임 없이 가운을 벗었다.
몸을 담그자, 피부에 남은 죽음의 감각, 가슴께에 박힌 검날의 기억 그 모든 게 천천히 씻겨나갔다.
“그래……엮이지 않으면 그만이야.”
비올레타는 물속에 몸을 기댄 채,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 * *
아침 햇살이 벨비에르 백작저의 높은 담을 타고 구석구석을 환하게 비추었다.
유리창을 통과한 햇빛은 대리석 복도를 따라 미끄러지듯 번져가며 따스함을 불어넣었다.
거대한 식당에는 이미 아침 식사를 위한 준비가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바닥에는 손질된 러그가 깔려 있었고 식탁 위에는 방금 다려낸 린넨 식탁보가 구김 하나 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 위로 금테가 둘린 은빛 식기와 찻잔은 정확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비비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첫째 딸이 보이지 않자 백작, 클로드 벨비에르가 하녀장에게 물었다.
2025.11.15 00:19
올라온 댓글이 없어요.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뷰컴즈 주식회사
대표 : 김학성 | 전화 : 1811-8389 | 이메일 : help@gling.co.kr
사업자 등록번호 : 492-88-01088 | 통신판매업신고번호 : 2022-서울영등포-1768
주소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당산로 171, 13층 13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