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 글링
캄캄한 밤, 달빛 아래. 와이어에 매달린 채 건물 사이를 이동하는 실루엣이 있다. ‘ 윤하연씨, 정신 차려보세요.’ 남자친구인 ‘지석’이 자신을 ‘린아’가 아니라 낯선 이름으로, 그것도 존댓말로 부르고 있다.
캄캄한 밤, 달빛 아래.
와이어에 매달린 채 건물 사이를 이동하는 실루엣이 있다. 물에 흠뻑 젖은 채, 잠든 것인지, 아닌지 분간이 되지 않은 여자가 남자의 팔에 안겨 있다.
“윤하연 씨, 당신 할머니, 위독하시대요.
윤하연…? 그게 누구지?
눈을 찌푸렸다. 지끈거리는 머릿속이 헤집듯이 아파왔다. 분명 자신은 ‘이린아’였다. 그리고 남자친구 지석의 어머니에게 물에 맞아 쓰려졌었는데…. ‘박지석’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낯선 이름을 부르며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날카로운 턱선과 우뚝 솟은 콧날. 조각같은 남자…. 누구였지?
”정신 차려 봐요. 당신이 누군지 기억해요?”
지석인지, 누군지 모를 남자가 심각한 얼굴을 하며 자신을 애타게 불렀다.
“당신 할머니 김옥자 씨. 아프시다고요.”
아-. 기억났다. 할머니. 우리 할머니. 린아, 아니 하연은 병상에 누워있는 할머니가 떠올랐고, 그 다음은 지독하게 무섭고 치가 떨리는, 한석주 회장. 그가 떠올랐다.
“기억났어요, 이석한 선배님.”
하연이 석한의 눈을 쳐다보았다. 하연은 아직 최면을 덜 깼지만, 분명히 또렷하고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석한은 저도 모르게 하연을 안아든 팔에 힘이 실렸다.
“윤하연 씨. 시간 없으니까 빠르게 설명할게요. 지금 원거리 촬영을 하고 있는데, 소리는 촬영하지 않고 있어요. 이제 저쪽 건물에 다다라서 촬영이 끝나면, 다시 깨울 테니 조금만 기다려요.”
“네? 네.”
***
“윤하연 씨. --- ”
또 할머니…. 하연의 눈에서 눈물 한방울이 또르르 떨어졌다. 그러자 석한의 눈썹 사이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연의 눈망울이 석한의 뭔가를 건드렸다. 데뷔 전 촬영한 이온 음료 광고에서 보기 드문 독특하고 청초한 외모의 무쌍 배우라고 인터넷을 달구었던 하연이었다. 석한은 가끔 하연이 나온 광고를 볼 때마다 뭔가 슬픔을 느끼곤 했었다. 또 그때 기분이다. 석한은 하연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촬영 사이, 당신에게 이 약물을 사용해서 추가로 기억조작을 사용하고 있던 것 같아요. 이것까지 모두 동의한 건가, 당신은?”
“네…. 맞아요.”
석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미련한 여자 같으니라고-. 약물을 지속해서 몸에 주입하면 당장은 보이지 않아도 문제가 생길 것이다. 석한은 약물을 옆 화분에 또르르 흘려보냈다. 오랫동안 준비한 일이었다. SJ그룹의 약점 하나를 쥐고, 말단 스텝에게 그와 함께 막대한 돈을 쥐어주고, 약물 삽입 일을 맡게 된 것이다. 석한은, 부와 명예엔 미련이 없었기에 본인에게는 복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물론 이것은 자신의 목적, 그리고 약간의 동정심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윤하연 씨, 자세한 정황 간략하게 설명, 부탁해요.”
석한이 답답한지 셔츠 단추 몇 개를 풀었다. 하연은 누워있던 소파에서 다리를 접으면서 옆에 앉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석한은 대신 그 앞에 있는 간이 의자를 펴서 앉았다.
하연은 비스듬했던 몸을 꼿꼿이 세워 앉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석주 회장이 제게, 할머니를 도와준다는 조건으로, 최면술을 통해 드라마 촬영을 할 것을 요구했어요.”
***
2060년 대한민국. 때는 과학이 고도로 발전하여 마법의 영역까지도 뻗어나게 되었다. 물론 아직 이는, 국내 주요 기업들과 정부의 주요 부처들만 알고 있는 고급 기밀이기도 했다. 그중 SJ그룹은 각종 사업의 영역에 손을 뻗으며 점점 몸집을 키워왔고 최근 한석주 회장의 지시로 ‘최면술’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석주, 그 늙은이의 시커먼 속이 어디까지인지 하연은 감히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그럼 윤하연, 자네가 그 최면술 연구 대상이 되어주게. 이번에 촬영하는 그 드라마로 실험하면 될 걸세.”
한석주 회장은 입가에 아주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늘 인자하고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던 회장이었기에 하연은 놀라 몸이 딱딱히 굳음을 느꼈다.
“네? 말도 안돼요.”
“자네의 몸은 아주 실험하기에 적합해. 최면에 걸리는 것도 풀리는 것도 자유자재거든. 실험하기에 딱 적합해.”
“혹시 제가, 강우 씨와 사귄 것으로 이러시는 건가요? 말씀드렸잖아요, 더는 만나지 않겠다고요.”
한강우. 하연은 강우가 재벌 집 손자인 것도 알지 못하고 만났다. 하지만 그가 그런 사람인 것을 알았을 때, 그리고 SJ그룹에서 사람이 찾아왔을 때, 하연은 강우를 바로 놓아주려고 했다. 강우를 많이 사랑했지만 그의 행복을 빌어주려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우는 그곳에서 빠져나오길 원했고, 하연 또한 그런 그를 밀어내지 못했을 뿐이었다. 지금은 어딘가로 잠적해버렸지만.
“아, 물론 내 손자 녀석 때문에 자네를 여기로 데려와 조금 기억을 조작하려고 했던 건 사실일세. 하지만 실험체로도 적합한 것 같아 말이야.”
“그치만-”
하연은 얼마 전 뇌졸중으로 혼자 쓰러져 계신 할머니를 생각했다. 자신이 실험체가 된다면, 그 후로 할머니를 돌볼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우리 SJ그룹이 어디까지 영향력이 있나 궁금한가? 당신 조모 김옥자가 당장 어디서도 치료받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어.”
“무슨…!”
하연의 동공이 몹시 흔들렸다. 하연이 소리 지르려고 하는 순간 한석주 회장은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고 이렇게 덧붙였다.
“자네에 실험하는 것 같은 최첨단 과학 장비들이 잘 실험되고 작동되기만 한다면, 김옥자 씨를 치료할 수 있는 최첨단 기술, 의학 장비, 모두 동원해서 건강을 되찾게 도와주겠네.”
하연은 한석주 회장의 제안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를 치료할 수 있다는데…. 자신이 마다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최면에 걸린 채, 드라마 촬영에 임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에 약물을 주입한다고 했지만 이미 임상실험을 통해 증명되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을 거라는 이야기와 함께.
그렇게 하연의 귓속에는 최면을 유도하는 종과 상성이 맞는 작은 기구가 삽입되게 되었다. 그 종소리는 하연의 귀에만 들렸고, 그 소리를 들으면 자연스레 최면이 시작될 것이었다.
그래, 어쩌면 미련한 짓이었지만, 부모님이 어릴 적 돌아가신 하연에게 할머니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할머니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
최면에 걸린 이후부터는 자신의 기억까지 조작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진실인지 하연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2025.11.29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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