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 글링
현실에서 학폭, 직장 갑질, 이별, 가족 갈등까지... 끝내 싸우지 못하고 “그냥 참았던” 사람들의 사연이 익명으로 쌓이는 비밀 코너가 있다. 복수물만 보며 버티다 죽음을 맞이한 한 독자는, 그 사연함의 관리자로 선택되어 다른 세계의 ‘악녀’로 다시 눈을 뜬다. 그녀의 역할은 단 하나, 현실 사람들이 참아버린 분노를 대신 터뜨리는 것. 의뢰가 접수될 때마다 사연은 귀족, 황족, 기사단, 상단 등으로 재구성되고, 악녀는 원망과 억울함을 무기 삼아 최적의 복수 각본을 짠다. 다만 그녀의 복수가 끝날 때마다 의뢰인의 현실에도 작게나마 ‘밸런스 패치’가 걸린다. 끊어야 할 인연이 자연스럽게 멀어지거나, 우연처럼 새로운 기회가 찾아오는 식으로. 오늘도 악녀의 서재에는 새로운 의뢰서가 도착한다. “이 정도 억울함이라면... 얼마나 세게 터뜨려줄까?”
그날, 나는 회사에서 잘리고 악녀로 취업했다.
“한소윤 씨, 이게 다 뭐야?”
팀장의 목소리가 회의실에 메아리쳤다.
긴 테이블 끝에 앉은 나는 모니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겨우 정신을 붙잡고 일어섰다.
“매출 분석 리포트입니다. 지난주에 말씀하신...”
“지난주에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고객사 숫자는 줄이고, 핵심 지표만 정리하라고 했잖아. 근데 이게 핵심이야? 내 상사도, 고객사 대표도 이걸 보고 싶어할 것 같아?”
팀장의 비웃음에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꽂혔다.
프레젠테이션 화면에는 내가 밤새 붙잡고 수정한 그래프와 표들이 빼곡히 떠 있었다.
“그래서... 수정해서 다시 올리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아무도 ‘그 지시, 지난주랑 다르지 않나요?’라는 말을 대신해 주지 않았다.
회의실 공기는 늘 그랬듯, 누군가의 잘못을 찾는 게임을 위해 완벽하게 조율돼 있었다.
“언제까지? 오늘 안에 되겠어?”
“야근... 하면... 네, 가능합니다.”
“야근은 니가 알아서 하고. 퇴근 전에 다시 보자고.”
팀장은 그 말을 남기고, 내 쪽을 보지도 않은 채 회의실을 나갔다.
동료들은 시선을 피하며 노트북을 닫았다. 한 명이 내 옆을 지나가며 귓속말로 중얼거렸다.
“괜히 찍혔네, 소윤 씨.”
괜히 찍힌 게 아니었다.
언제나처럼, 누군가를 대신해 욕을 먹을 사람이 필요했고, 그 자리에 내가 적당했을 뿐이다.
***
밤 열한 시.
사람이 빠져 나간 사무실에 형광등 소리만 지직거렸다.
엑셀 파일을 또 다시 열어 보면서, 나는 문득 어릴 적 담임 선생님 얼굴이 떠올랐다.
_“네가 그냥 참아. 네가 한 번만 참으면 조용해져.”_
초등학교 때는 왕따 당하는 친구 대신 내가 나섰다가, 그 친구가 전학 가는 걸 지켜봤다.
중학교 때는 뺨을 때린 아버지 대신 내가 엄마를 달래며 사과했다.
대학 때는 바람피운 남자친구 대신 내가 헤어진 걸 죄송해하고 다녔다.
그래서인지, 나는 언제나 “한 번만 더 참자” 쪽을 택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_그러니까 지금도, 여기 앉아 있겠지._
모니터 하단에 뜬 시계를 보다가, 나는 결국 엑셀을 닫아 버렸다.
더 수정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어차피 팀장이 원하는 건 ‘내가 틀렸다’는 결론 하나뿐인데.
“퇴근이나 할까.”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는 습관처럼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각종 메신저와 메일 알림 사이, 빨간 점이 하나 눈에 띄었다.
_『G-book – 오늘의 추천 복수물』_
복수물만 모아 놓은 전용 서랍.
힘들 때마다 나는 그 서랍을 열었다. 누군가는 소설을 “현실도피”라고 했지만, 나에겐 “현실 견디기”였다.
_오늘의 추천 – 〈공작가의 미친 악녀는 피해자의 편입니다〉_
‘악녀’라는 단어에 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세상에서라도, 누군가 좀 미쳐서 대신 부숴 주면 좋겠다고 수십 번은 생각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작품 상세 정보를 훑어 보는데, 아래쪽에 낯선 메뉴가 하나 보였다.
_『익명 사연함 – 현실에서 겪은 부당함을 보내 주세요. 악녀가 대신 복수해 드립니다.』_
“이게 뭐야, 이벤트야?”
작은 글씨로 주의 사항이 달려 있었다.
_※ 실제 법적 조치나 현실 폭력을 권장하지 않습니다._
_※ 작품 소재 개발을 위해 익명 사연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_
작품 소재.
그 말 하나에 나는 묘하게 안심하고, ‘사연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어차피 수많은 제보 중 하나일 텐데, 내 얘기 하나쯤 섞여 들어가면 뭐 어떤가.
입력창이 떴다.
_당신이 겪은 부당함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적어 주세요._
키보드를 치는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가, 이내 내 마음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_회사에서 팀장은 지시를 바꾼 뒤 늘 제 책임으로 돌립니다._
_동료들은 다 알고도 입을 다물어요. 그게 안전하니까요._
_어릴 때부터 늘 제가 참으면 된다고 배워서, 오늘도 아무 말 못 했어요._
_누군가 한 번만, 제 대신 똑같이 돌려줬으면 좋겠습니다._
마지막 문장은 쓰다가 지웠다가, 다시 적었다.
_“제가 참은 건, 누가 대신 터뜨려 줄 수 없나요?”_
보내기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나는 짧게 웃었다.
“이게 뭐라고, 이런 말까지 쓰고 있어….”
_어차피 누가 보지도 않을 텐데._
그래도, 보내기를 눌렀다.
순간 화면이 검게 번쩍이더니, 이상한 문구가 떴다.
_『사연이 접수되었습니다. 담당 악녀를 배정하는 중입니다.』_
“와, 컨셉 제대로네. 요즘 마케팅 부서 열일하네.”
나는 그러려니 하고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가 닫혔고, 나는 계단을 택했다.
이 시간에 엘리베이터를 타면, 고장이라도 나면 꼼짝없이 갇히니까.
비상계단을 내려가면서 홀 안쪽 유리창으로 빗줄기가 보였다.
오늘은 이상하게 비냄새가 진하게 났다.
_그래도 내 사연, 언젠가 소설 속 어딘가에 한 줄쯤은 섞일까._
그 생각을 하는 사이, 계단 끝에서 누군가가 올라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어, 죄송합...”
비에 젖은 구두, 미끄러운 발판, 서로 어색하게 엇갈린 무게 중심.
순간 몸이 허공에 떴다.
손에서 미끄러진 휴대폰이 공중에서 천천히 회전했고, 깨진 화면 위로 마지막 알림이 번쩍였다.
_『담당 악녀 배정 완료 – 신규 관리자 채용 승인』_
그리고, 모든 것이 검게 꺼졌다.
***
“......마님, 들리십니까? 마님?”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아니, 적어도 그들의 목소리는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눈꺼풀이 무겁게 떠졌다.
먼저 보인 건 천장이었다.
현대식 흰 석고천장 대신, 연보라색 비단 커튼이 사방에서 물결처럼 늘어져 있었다.
“와... 호텔 스위트도 아니고.”
입 밖으로 새어 나온 내 목소리가 낯설게 울렸다.
옆에서 깜짝 놀란 여자의 비명이 터졌다.
“마, 마님! 정신이 드셨습니까?”
시선을 돌리니, 곱게 땋은 금발에 검은 메이드복을 입은 소녀가 내 옆에서 눈물을 그렁이며 서 있었다.
_메이드복?_
나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키려고 했다가, 머리가 핑 도는 바람에 다시 눕고 말았다.
부드러운 감촉이 등을 받쳐 주었다. 침대였다. 그것도 아주 푹신한.
“잠깐만요... 여기가... 어디죠?”
2025.11.30 17:16
올라온 댓글이 없어요.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뷰컴즈 주식회사
대표 : 김학성 | 전화 : 1811-8389 | 이메일 : help@gling.co.kr
사업자 등록번호 : 492-88-01088 | 통신판매업신고번호 : 2022-서울영등포-1768
주소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당산로 171, 13층 13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