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피폐 역하렘 게임 속 ‘백신 프로그램’으로 태어난 성녀, 다프넬라. 그리고 그녀에게 엉겨드는 굴지의 집착광견들. “너는 내 것이다. 네 몸, 네 목숨, 네 능력, 네가 쉬는 숨 한 자락까지 전부 다.” 소유욕으로 반쯤 미쳐 버린 황태자, 하이젠. “어떻게 해야 저를 돌아보시겠습니까. 교황과 추기경들의 목이라도 뜯어오면 될까요?” 고결한 얼굴로 배덕을 속삭이는 성기사단장, 뷔레스턴. “착각하지 마라. 절대 너를 걱정하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너한테 손댄 놈이 누구라고?” 시도 때도 없이 짖어 대는 다혈질 소공작, 록산드. 올무처럼 조여 오는 속박 속에서 다프넬라는 간절히 바랐다. 이깟 세상, 전부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그런 그녀 앞에 검은 바이러스를 품은 비밀스러운 남자가 손을 내민다. “드디어 찾았군, 다프넬라.” 결코 서로 융화될 수 없는 존재. 그러나 서로만이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운명. 백신과 바이러스로 만난 두 사람. “내가 그대를 낙원에 가두겠다면, 따라올 텐가.” 이 남자는 정녕 낙원일까. 혹은 더없이 잔혹한 나락일까. 당신의 손을 잡으면, 이 빌어먹을 세상을 어디까지 무너뜨릴 수 있지?
#001화
□□, ‘빨간 구두’ 동화의 결말을 아니?
새빨간 구두를 신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춤을 춰야 했던 소녀의 이야기.
발이 멋대로 움직여 가시밭길에서도 춤을 멈출 수 없었다는 잔혹 동화 말이야.
피눈물을 흘리며 춤을 추던 소녀는 가장 먼저 하늘에 자비를 구걸했대. 하지만 돌아오는 거라곤 냉혹한 목소리뿐이었지.
[너는 평생 그렇게 춤을 춰야 할 운명이야. 어서 더 화려하게 몸부림쳐 보렴. 죽을 때까지, 숨이 멎을 때까지, 내가 만족할 때까지, 계속!]
이후 소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가혹한 운명을 받아들였을까? 체념하고 자신의 과오를 반성했을까?
아니.
억지로 춤을 추는 발목 따위, 콱 잘라 버렸단다.
그리고 자유를 얻은 뒤엔 하늘을 향해 한껏 비웃어 주었지. 잘려서도 또각또각 춤을 추는 발목을 내던지면서.
이따위 구두, 너나 신으라고.
* * *
[‘프롤로그 : 빨간 구두 소녀’가 업데이트되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Yes / No
투명한 시스템 창 위로 농염하게 무르익은 달빛이 쏟아졌다. 너무 눈이 부셔서 꼭 신의 계시라도 내려오는 것 같았다.
에스트레아 제국의 성녀, 다프넬라 아이테르는 그 앞에서 손을 모은 채 기도했다.
‘신이시여, 당신은 개새끼입니까!’
물론 언제나 그랬듯 신은 응답하지 않았다. 여주인공이 사라진 세계엔 균열 한 점 없었고, 시간은 일률적으로 흘렀다.
심장께에서부터 짙은 배신감이 몰려왔다.
“듣고 계십니까, 성녀님?”
시스템 창을 치우자 귓가에 낮고 고압적인 목소리가 박혔다. 오늘 같은 날 마주하기 그리 달가운 종류는 아니었다.
허락 없이 침실에 들이닥친 기사들의 무례함도, 당장 검을 빼 들 듯한 위압적인 시선도, 우악스럽게 손목을 잡아채는 악력도 그랬다.
“헬렌 황녀 전하를 시해하려 한 혐의로 성녀님을 압송합니다. 황태자 전하의 명이니 순순히 동행해 주십시오.”
그리고 ‘황태자’라는 칭호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고약하게 들렸다.
자신이 헬렌을 죽이려 했다니. 다른 누구도 아닌 헬렌 덴버 에스트레아, 이 세계의 여주인공을? 나의 유일한 위안이자 안식을?
다프넬라는 입을 막고 가까스로 토악질을 참았다. 그러는 사이 기사 한 명이 팔을 잡아당겨 그녀를 침실 밖으로 질질 끌어냈다.
이래 봬도 제국의 유일한 성녀인데 취급이 사냥터 짐승만도 못했다. 애써 반항해 보려 했지만 온몸을 휘감는 열기 때문에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놔라.”
다프넬라는 비틀비틀 계단을 내려가며 겨우 목소리를 냈다. 잔뜩 말라붙은 음성이 나뭇가지가 부서지는 소리처럼 처량했다.
“놓으란 소리 안 들리나?”
“조용히 따라오십시오. 저희는 죄인을 압송하라는 명에 따를 뿐입니다.”
“놔라. 진짜로 죽여 버리기 전에.”
다프넬라의 목소리가 거칠어지자 기사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뿐. 고열로 기력이 약해진 성녀 따윈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다. 이내 기사가 쯧 혀를 찬 뒤 재차 다프넬라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잠깐……!”
결국 몸을 가누지 못한 다프넬라는 계단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그런데도 악녀의 말로란 무릇 이래야 한다는 듯 기사의 손아귀엔 더욱 힘이 들어갔다.
손목과 어깨, 무참히 쓸리는 무릎 뼈 사이로 첨예한 고통이 스몄다. 그 통증과 모멸감을 비집고 다시금 헬렌이 떠올랐다.
잠시 눈을 뗀 찰나 다른 영혼이 깃들어 버린 황녀 헬렌의 몸. 주인이 바뀐 그 육체를 붙들고 서럽게 울부짖던 순간을.
차라리 꿈이길 바란 일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다시 눈을 뜰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다프넬라의 몸은 어떤 것도 꿈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지표가 됐다.
헬렌의 영혼이 사라진 것도, 열이 오를 때까지 권능을 쏟아부은 것도, 그럼에도 돌이킬 수 없던 것도 모두 현실이었다.
끝내 마음이 몰락한다.
헬렌……. 이제는 사라져 버린 이의 이름만 공허하게 입 안을 맴돌았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
그때 잘 벼린 도끼 같은 목소리가 묵직하게 복도를 갈랐다. 다프넬라는 볼품없이 넘어진 채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유독 부산스러운 계단의 끝자락, 문간으로 이어진 군청색 융단 위에 다부진 그림자가 드리웠다.
“놔라. 감히 누구 몸에 함부로 손을 대고 있는 거냐.”
포악하게 다프넬라를 잡아끌던 기사들이 누군가의 발길질에 의해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다프넬라는 더운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허락 없이 공작 저로 쳐들어온 것도 모자라 성녀를 짐승처럼 끌고 가? 네놈들 눈엔 아이테르 가문이 퍽 우스웠나 보군. 아니면 당장 죽고 싶은 것이든가.”
아이테르 공작가의 장남이자 황실 직속 적기사단의 단장, 록산드 아이테르.
다프넬라의 호적상 오라버니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담녹색 눈동자를 번뜩이고 있었다.
록산드는 다프넬라를 일으켜 준 뒤 눈앞의 기사들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날렵한 턱선 아래로 분노를 알리는 핏대가 꿈틀거렸다.
“제복을 보아하니 청기사단인가. 황태자 전하의 기사단이 언제부터 법도도 모르는 축생 소굴이 되었지? 대가리에 뭐가 들었기에 짖을 데 안 짖을 데 구분도 못 하고 설치는 거냐!”
거침없는 록산드의 언사에 기사들은 물론 다프넬라도 혼란을 감추지 못했다.
도와주는 건가? 지금? 왜?
2025.12.11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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