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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토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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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사월
110화무료 3화

자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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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영웅이라 불렸던 용병, 토파즈. 죽었다고 알려진 토파즈는 ‘죽음의 숲’에서 몇 년째 은둔하고 있었다. 어느 날, 누구도 발을 들이지 않는 숲에 불청객이 들이닥친다. “저는 카르옌이라고 합니다. 은인께서는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토파즈를 은인이라고 칭하는 이상한 마법사는 숲의 평화로운 일상을 헤집어 놓는다. “토파즈님, 저를 지켜주세요.” 카르옌이 손을 내밀었다. 희고 고운 손이었다. “저와 함께 떠나주세요. 제가 당신을 고용하겠습니다.” 토파즈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할 것이 분명한 남자는 마치 오래된 소망이라도 고백하듯 눈꺼풀을 떨고 있었다. 정말 간절하기라도 한 것처럼. 결국 토파즈는 카르옌의 의뢰를 받아 숲을 떠나기로 결심하는데……. *** 토파즈가 카르옌의 멱살을 붙들 기세로 물었다. “너 나한테 마법 걸었어?” “마법을 안 써도 토파즈님 정도는 들 수 있답니다.” 자신이 검술 실력은 부족해도 기초 체력은 괜찮다느니, 이 와중에도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떠들어 대는 마법사 덕분에 긴장감이 훅 꺼졌다. 그러나 꺼졌던 긴장감이 다시 치솟은 것은 카르옌이 달리는 방향이 발코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즉시였다. “너 3층에서 뛰어내려도 멀쩡해? 네 근력이 그 정도라고?” 토파즈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손을 뻗어 카르옌의 어깨와 등을 더듬어 댔다. 꿈틀거리는 등 근육으로 보아 몸은 생각보다 탄탄한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애초에 그게 근력이랑 상관있나요?” “그럼 당장 내려놔, 미친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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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여기가 우리 무덤이 될지도 모르겠어.”


메르디나가 읊조렸다. 하란은 소름 끼치는 소리 하지 말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묘지와 어울리는 분위기라는 점은 반박하기 힘들었다.


숲속을 헤맨 지 수 시간째였다. 한번 들어가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곳이었다. 악명이 높아 각오는 했으나 숲 내부는 상상 이상으로 음산했다.


하늘까지 뻗은 나무들이 빼곡해 한 치 앞을 살피기 힘들었고, 숲의 초입을 지나자마자 멀쩡하던 나침반마저 팽글팽글 돌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골치 아픈 것은 마수가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한다는 점이었다. 이 땅이 ‘죽음의 숲’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다행히도 두 사람은 제국에서 뛰어난 기사로 손꼽히는 이들이었다. 두 젊은 기사는 마수들을 베어내고, 나무 기둥에 표식을 남기거나 천을 매달아 놓으며 길을 찾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불행은 행운에 비해 무척 커다랬다. 첫 번째 불행은 그들이 번갈아서 업고 다녀야 하는 환자가 있다는 점이었다. 메르디나가 검에 묻은 끈적한 피를 털어내며 물었다.


“전하, 살아 있어?”


“……아마도.”


하란이 턱에서 흐르는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하란의 등에 축 늘어져 있는 천 뭉치는 꼭 시체처럼 보였다. 메르디나가 가까이 다가가 로브 자락을 젖혔다. 환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신전 벽화에 그려진 천사처럼 아름다운 남자였다. 꼭 감긴 눈꺼풀은 얇은 꽃잎처럼 섬세했고 이마에서 콧대로 이어지는 선은 유려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혈색은 좋지 않았다. 새카만 머리칼이 식은땀에 젖어 흐트러져 있었고 입술은 푸르게 질려 있었다.


메르디나가 그의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렇게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님을 알면서도 몇 번이나 맥이 뛰는지 확인해야 했다. 당장 숨이 멎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파리한 얼굴이었으므로.


하란이 환자를 고쳐 업으며 말했다.


“전하는 잘 먹지도 않으면서 왜 이렇게 무겁지? 경량 망토 입힌 거 맞아?”


“입혀서 그 정도야.”


“나도 차라리 픽 쓰러져 버리고 싶네.”


하란은 불평하면서도 경계심을 낮추지 않고 주위를 살폈다. 그는 지나온 길을 되짚으며 머릿속으로 지도를 만들려고 애썼지만 별로 소용없는 짓이었다.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방향을 잃는 숲인 것은 둘째치고 어디를 목적지로 삼아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그들의 두 번째 불행이 바로 그것이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왜 가야 하는지 그들조차 정확히 모른다는 점. 추격을 피해 ‘그렌로샤 숲’으로 가자고 주장한 이는 지금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확실히 추격이 따라붙을 걱정은 없겠어. 이 숲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오는 미친놈들은 우리뿐일 테니까.”


미로 같은 숲을 헤매다 보니 밤이 되고 말았다. 사방에는 안개까지 자욱하게 끼었다. 어느 순간부터 짐승인지 마수인지 모를 것들도 덤벼들지 않았다. 어쩐지 그게 더 불길한 징조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함부로 움직이는 건 위험하겠어.”


하란의 판단에 메르디나도 동의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들은 마도구를 잔뜩 갖고 있었다. 잘 뒤져 보면 하룻밤쯤은 죽지 않게 해 줄 만한 물건들을 찾을 수 있을 터였다.


그때 앞서 걷던 메르디나가 멈춰 섰다. 먼 곳에서, 아주 희미하지만 빛이 보였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밝힌 빛이 틀림없었다.


“하란, 봤어?”


“…….”


“저쪽에 빛이…….”


대답이 없는 것이 의아해 돌아보는 순간이었다. 목덜미에 차가운 것이 스쳤다. 메르디나가 숨을 멈췄다. 날카로운 검 끝이 목에 닿아 있었다. 한 치만 움직여도 깊게 파고들 것 같았다.


그 순간 메르디나는 설마, 하면서도 하란의 배신을 의심하고 말았다. 그러나 하란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주군을 등에 업은 채 한 손으로 발검하기 직전의 자세였다. 늘 웃음을 걸치고 다니던 얼굴이 새파랗게 굳어 있었다.


“……!”


제삼자가 검을 뽑고 다가오는 것을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들은 하룻밤에도 서너 명의 암살자들에게 노려지는 2황자의 호위였으며, 전쟁에도 여러 번 나가 본 기사들이었다. 이토록 적막한 숲에서 인기척도 읽지 못할 실력이라면 진작 그 목이 떨어졌을 것이다.


“……누구십니까.”


메르디나가 등 뒤의 인영에게 물었다.


“내가 물을 말이야.”


등 뒤에서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말투가 기이하게 느껴졌다.


“여긴 그렌로샤야. 웬만한 이들은 한 발짝만 잘못 들여도 살아나갈 수 없지. 목숨이 아깝다면 돌아가는 게 좋아.”


메르디나는 단순히 발을 잘못 들인 척해야 할지 짧게 고민했으나 곧바로 그 생각을 폐기했다. 상대는 이미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것 같았다. 타인의 시선을 한순간도 눈치채지 못했기에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나뭇가지가 길게 뻗은 방향을 따라서 하룻밤 가다 보면 작은 마을이 있어.”


차분하다 못해 건조한 말투였으나, 튀어나온 말은 의외로 관대했다. 당장 죽일 생각은 없는 것일까. 메르디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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