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했는데, 남편이 집에 안들어온다.
깔끔한 감기약🌀
1화무료 1화

자유 연재 | 글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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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이 망할 남편님아!! 결혼하자마자 인다르행 배를 타다니!!”

 

에일리는 편지를 펄럭이며 방 한가운데서 고함을 질렀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어? 결혼식도 안 나오고! 결혼식 날 인다르?! 세상에, 진짜 대단하시네!”

 

문 밖에 서 있던 하인들이 얼어붙었다. 새 안주인의 목소리가 복도 끝까지 울려 퍼졌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지만, 에일리는 듣지 못했다.

 

“누가 결혼식 날 해외 파견을 가요! 이게 말이 돼요?!”

 

에일리는 편지를 다시 펼쳐 들고 읽었다.

글씨는 단정했고, 마치 공문서처럼 딱딱한 필체였다.

 

'인다르행 배', '귀환 미정', '당신의 남편으로부터'.

 

“하, 당신의 남편이라고? 얼굴도 못 본 남편이 무슨……”

 

말을 하다 말고 에일리는 피식 웃었다.

화가 나다 못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 어쩌겠어. 이미 결혼했는데!”

 

에일리는 편지를 책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고 창문으로 걸어갔다.

밤하늘에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낯선 저택, 낯선 방, 낯선 하늘.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이상하게도 두렵지는 않았다.

 

 

***

 

 

몇 시간 전.

 

결혼식장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거대한 성당의 천장은 아득히 높았고,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알록달록한 빛이 쏟아졌다.

붉은 융단은 발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고, 하객들은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속삭임조차 조심스러웠다.

 

모두가 한 가지 사실을 알면서도 입 밖으로 꺼내길 꺼리는 것 같았다.

신랑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에일리는 대기실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순백의 드레스는 허리를 꽉 조였고, 레이스 베일은 어깨 위로 가볍게 내려앉아 있었다.

손에 든 부케에서는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완벽해.’

 

거울 속 자신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레스는 정말 예쁘네. 이 정도면 충분히 값어치를 했어.’

 

문제는 신랑이었다.

 

상대는 전쟁 영웅.

북방 전선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황제로부터 직접 백작 작위를 받은 사내.

평민 출신으로 귀족의 반열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그런데 아무도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언청이라더라.”

 

“절름발이래.”

 

“얼굴이 화상으로 녹아내렸대.”

 

“성격이 괴팍해서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던데.”

 

며칠 사이 들은 소문만 해도 열 가지가 넘었고, 하나같이 끔찍했다.

하녀들은 에일리를 볼 때마다 안쓰러운 눈빛을 보냈고, 친척들은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에일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때.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었잖아.'

 

아버지의 무역선이 폭풍에 침몰했다는 소식을 들은 날, 에일리는 울지 않았다.

울 시간이 없었다.

 

장례식보다 채권자들이 먼저 왔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저택 문을 두드렸고, 아버지의 서재를 뒤졌고, 장부를 들고 갔다.

가구가 하나씩 사라졌다. 어머니의 유품이었던 찬장도, 아버지가 아끼던 책상도.

하인들이 하나둘 떠났다.

그래도 저택만은 지키고 싶었다.

에일리가 태어나고 자란 집. 어머니의 온기가 남아 있는 곳.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결국 그마저도 빼앗길 날이 정해졌다.

 

열여덟 살 에일리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황실의 중개로 백작가의 청혼이 들어왔다.

 

조건은 간단했다. 결혼하면 빚 탕감.

에일리는 백작 부인의 지위를 얻고, 백작은 '정상적인 가정'이라는 외피를 얻는다.

평민 출신 귀족에게 몰락했어도 귀족 가문의 영애는 필요한 모양이었다.

 

'거래지 뭐. 나쁘지 않아.'

 

에일리는 부케를 들어 올렸다.

하얀 장미와 푸른 잎사귀가 어우러져 있었다.

 

'그래도 꽃은 예쁘네! 이것만으로도 결혼식 온 보람이 있어.'

 

문이 열렸다. 시종이 들어왔다.

 

“준비되셨습니까, 영애님.”

 

“네!”

 

에일리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시종이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신랑의 얼굴도 모르는 결혼식에 이렇게 밝은 신부는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

 

 

식장 입구로 걸어 나갔다.

 

하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에일리에게 쏠렸다. 수백 개의 눈동자.

그 안에는 호기심, 연민, 그리고 약간의 조롱이 섞여 있었다.

몰락한 발렌시아 자작가의 딸. 빚더미에 올라앉아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가는 불쌍한 신부.

에일리는 그 시선들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당당하게 걸었다. 등을 펴고, 고개를 들고, 한 걸음 한 걸음 단단하게.

 

'괜찮아. 할 수 있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제단 앞을 바라봤다.

신랑이 서 있어야 할 자리는 비어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5분.

10분.

아무도 오지 않았다.

 

사제가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귀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저 불쌍한 아이” 같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설마…….'

 

에일리의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

 

'정말로 안 오는 건가? 설마 이 결혼 자체가 없던 일이 되는 건가?'

 

그러면 빚은? 저택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손이 살짝 떨렸다. 부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

성당의 묵직한 문이 열렸다.

검은 정복을 입은 기사가 성당 안으로 들어왔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다. 검은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 넘겨져 있었고, 얼굴은 예상외로 곱상했다. 날카로운 턱선, 오똑한 코, 깊은 눈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백작이라기엔 이상했다.

기사라기엔 너무 고요했고, 눈빛이 무겁고, 어딘가 지쳐 보였다.

전장을 오래 떠돈 사람 특유의 그림자가 느껴졌다.

화려한 성당 안에서 그 남자만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았다.

 

그는 성큼성큼 버진로드를 걸어와 에일리 옆에 섰다.

 

“자작 영애 에일리 발렌시아 님께 인사드립니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깊은 울림이 가슴 밑바닥까지 스며들었다.

 

에일리는 그를 올려다봤다. 숨이 멎었다. 가까이서 본 얼굴은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검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 날카롭게 선 턱선, 곧은 코. 이마를 가로지르는 옅은 흉터마저 그를 더 날카롭게 만들었다.

그런데 눈.짙은 회색 눈동자가 에일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둡고, 깊고, 차가웠다.

그런데 그 안에 묘한 것이 있었다.

쓸쓸함? 외로움? 오래 혼자였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림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 사람이 백작?'

 

소문과 전혀 달랐다.

 

‘언청이? 절름발이? 화상으로 녹아내린 얼굴? 전부 거짓말이었나?’

 

오히려 너무 멀쩡했다. 아니, 멀쩡한 정도가 아니라 심장이 또 한 번 뛰었다.

 

남자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귓가에 닿는 낮은 목소리.

 

“백작님께서 급한 사정이 생기셨습니다.”

 

에일리는 대답해야 했다. 뭐라도 말해야 했다.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기사가 말했다.

 

“부득이하게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시게 되어, 대신 제가 예를 갖추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에일리는 눈을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대신이요?”

 

“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른 의미로.

 

'뭐야, 이 사람이 아니야?'

 

방금 그 두근거림을 돌려받고 싶었다.

 

“그럼 진짜 남편은 결혼식에도 안 나타났단 말이에요?”

 

“....”

 

기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어딘가 미안함이 묻어 있었다.

에일리는 기사를 빤히 쳐다봤다.

기사는 시선을 내리고 있었다. 귀가 살짝 붉어진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인 채 에일리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일리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 상황에 화를 내야 할까? 울어야 할까? 결혼식장을 뛰쳐나가야 할까?

 

하객들이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이 신부가 어떻게 반응할지.

모두가 드라마틱한 장면을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에일리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뭐, 어쩌겠어.'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가 봤자 빚쟁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울고불고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

 

“알겠습니다.”

 

에일리는 미소를 지었다.

환한 미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럼 기사님이 대신 에스코트해 주시겠어요?”

 

기사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약간 커졌다.

분명 다른 반응을 예상했던 모양이었다.

 

“예, 예.”

 

그는 손을 내밀었다.

에일리는 그 손을 잡았다.

크고 단단한 손이었다.

검을 오래 잡은 사람의 손.

 

'오, 손 따뜻하네.'

 

하객들이 웅성거렸지만, 에일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기사의 손을 잡고 제단 앞으로 걸어갔다.

 

결혼 서약은 빠르게 진행됐다.

 

사제가 경전을 낭독했다.

백작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기사가 대신 대답했다.

사제도, 하객들도, 모두가 어색한 표정이었지만 식은 멈추지 않았다.

 

“신부는 신랑을 평생의 반려자로 맞이하시겠습니까?”

 

“네.”

 

에일리는 또렷하게 대답했다.

 

반지가 에일리의 손가락에 끼워졌다.

차갑고 무거운 금반지. 맑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예쁘네. 비싸 보여.'

 

“이제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사제의 선언이 떨어졌다.

박수가 터졌다.

어색한 박수였지만, 어쨌든 박수였다.

 

에일리는 손을 들어 하객들에게 흔들었다.

 

'했다! 결혼했어! 이제 백작부인이야!'

 

옆에 선 기사는 에일리를 힐끔 쳐다보다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목이 약간 붉어져있었다.

 

'왜 저렇게 수줍어하지? 신기한 사람이네.'

 

에일리는 속으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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