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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도 성녀는 파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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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악어
1화무료 1화
자유 연재 | 글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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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던 이름, 에델. 잘 알려진 가문의 사생아로 태어나 시들어가던 그녀는 원치 않았던 '성녀'라는 고귀한 이름을 얻게 된다. 그러나 제국은 알지 못한다. 그녀의 고귀한 피 속에, 태초부터 이교도의 심장이 뛰고 있음을. 성스러운 예언이라 속삭이던 목소리는 실은 저주받은 흑마법의 울림이며, 그녀가 받은 모든 축복의 근원에는 파멸적인 진실이 숨어 있다. 위선으로 가득 찬 제국의 심장. 그 속에서 거짓된 신을 섬기며 피어나는 뒤틀린 욕망, 그리고 이교도 성녀를 파멸로 이끌 지독하고 잔혹한 사랑 이야기.

공모전 참여작#로맨스판타지#서양풍#복수#피폐물#사연캐#계략녀#능력녀

"제 57대 성녀, 에델 베르사. 신탁 앞으로 나오시지요."


교황의 목소리가 사방에 울러퍼졌다.


에델은 조심히 신탁 앞으로 나서 교황을 쳐다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수의 사람이 에델의 삶을 단죄하듯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대는 모든 성녀 희망자들 중 가장 고결한 존재로써, 56대 성녀 세르투아를 이을 성녀로 발탁되었습니다."


"오늘부로 그대는 모든 사명을 다하여 성녀가 되어야 합니다."


"성녀로써 제국에 대한 헌신을 갖추고 절대신 베리타스의 목소리를 전달할 의무가 있습니다."


"성녀 세르투아의 정수를 그대에게 선사하오니 어서 고귀함을 증명하시지요."


흰 옷을 입은 사제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 붉은 카펫에 올려진 목걸이를 건냈다.

목걸이는 반구의 보석함 형태로 내부에 투명한 액체가 들어있었다.

가득 찬 액체는 흘러나올 듯 위태로웠지만 결코 세지 않았다.


에델은 다음에 할 일을 알고 있었다.

이미 수십 번 연습한 성녀 즉위식이었기에, 그녀는 주저할 것 없이 목걸이를 들어올렸다.

목걸이를 여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녀는 지긋이 보석함을 열어 내부의 액체를 머리 위에 부었다.

한 방울 빠짐없이 액체가 흘러나오자, 에델의 머리 위에 놓인 검은 색의 베일이 희게 물들기 시작했다.


"성녀 세르투아의 눈물으로 에델 베르사는 고결한 존재임가 증명되었습니다!"


교황의 외침과 함께 박수갈채가 들려왔다.

에델은 조심히 카펫에 함께 있던 천으로 액체를 닦아냈다.


"성녀 에델은 소감을 말하시지요."


교황이 안내해준 제단의 맨 앞자리는 에델에게 주어진 몇 없는 시선이었다.


"성녀가 되었음을 진심으로... 황송하게 생각합니다."

에델은 어렵게 내뱉은 한 마디가 여운 없이 전달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평생 몇 마디 대화해본적도, 제게 말을 건내준 상대도 없었다.

이제 와 제국의 과반수 이상에게 소감을 말하자니 걸음을 처음 내딛는 아이마냥 어색한 게 당연했다.


그럼에도 해내야 했다.


"저는... 비루한 존재일 뿐입니다. 미덥지 못하신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성녀가 되어서, 아니, 되었기에.. 저는 제국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되 성녀의 본분을 수행하며 성실히 성녀 세르투아의 업을 계승하겠습니다."


"들어주셔서, 아니, 여기까지 와 주셔서..."


에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한 마디 내뱉을때마다 가시가 입을 찌르는 느낌이었다.

탐탁치 않아하는 수많은 시선이 계속하여 그녀를 옥죄어왔다.

누구 하나 한 마디 꺼내지 않았지만 모두가 그녀를 혐오했다.


"풉"

그때였다. 귀빈석의 뒷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에델은 놀란 표정으로 웃음소리의 대상을 쳐다보았다.


검붉은 머리카락, 사나운 눈매, 누가 봐도 훤칠한 인상.

제2 황태자로 알려진 카이덴 카이로스였다.


그는 뭐가 그리 웃긴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에델에게 손짓했다.


"아, 미안해. 말하는 게 연습도 안하고 급조해낸 성녀 같아서. 뭐 맞기는 하지만, '그 위대하신 성녀님'이 제단 앞에서 떠는 모습은 처음이라서 말야. 내가 방해했나?"


카이덴의 말이 끝나자마자 객석에서 하나 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참아내던 비웃음을 터뜨리는 듯한 웃음이었다.


에델은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어떤 존재도, 성녀의 권위를 논하던 교황조차도 상황을 수습하지 않았다.


그러나 카이덴의 비난이 그녀를 비참히 무너뜨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색하던 시선도, 너무나 고요해 제 심장 소리마저 들릴듯한 제단도 그의 말 덕분에 사뭇 옅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점멸하고 소란이 커졌다.


적응할래야 적응할 수 없는 관경 속에서 에델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와 주신 귀빈 여러분, 그리고 객석에 앉아계신 분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단순히 성녀라는 직책이 아니라 절대신 베리타스의 목소리를 빌리는 자입니다."


"베리타스의 입을 빌려 말하길, 모든 분들께 평화와 안식, 그리고 축복이 있길."


성녀의 대사는 여기서 끝이었다.

에델은 조용히 뒤 돌아 제단의 끝 부분으로 향했다.


아치형 제단의 기둥이 그녀의 모습을 감추자 그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교황이 성녀 즉위식을 마무리하며 귀빈들을 따로 대접하는 동안 에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갈색 머리에 차분한 인상. 푸른 브로치를 달고 있는 귀족의 자제들.


분명히 귀빈석 어딘가에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녀의 가족이었다.


찾으려고 둘러본 것은 아니었으나 함께 보낸 세월이 증명하듯 그들에게 시선이 갔다.


"어이, 사생아."

맨 앞줄에 앉은 어린 소녀는 그녀에게 입모양을 벙긋거리며 말을 전했다.


"운 좋게 성녀가 되었으니 보답하는 거 잊지 말라고?"


선명한 입모양에서 유추되는 너무나 뻔한 말에 에델은 피식 웃었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에델을 가족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에델은 그저 사생아 취급 받으며 온갖 잡일을 맡아 하던 하수인일 뿐이었다.


베르사 가문의 이름을 따랐으나 너무나 다른 존재로 자라난 그녀는 그들에게 좋은 미끼였다.


성녀 세르투아가 서거한 후 한 달 남짓의 성녀 희망자 명단에 그녀가 들어간 것도,


아무런 능력 없는 그녀가 제국이 우러러보는 성녀가 된 것도


전부 그들 덕분이었다.


그들은 베르사 가문에게 최소의 명예를 안겨줄 수 있음에 감사해하라며 마지막 날까지도 에델을 괴롭혔다.


수년간 받아온 구박이었지만 어째선지 해방감이 들기도 하였다.


에델은 성녀가 되고자 하지 않았다.

성녀 희망자 명단에 적힌 것마저 그녀가 아니었으니.


하지만 베르사 가문을 벗어나기만 한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그때였다.


"성녀? 안 가고 뭐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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