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준서와 성다민은 같은 날 태어나 같은 동네에서 자란 축구 소년·소녀다. 그러나 재능은 공평하지 않았다. 천재적인 감각을 지닌 다민과 달리, 준서는 노력으로만 그녀를 따라잡으려 애쓴다. 준서에게 다민은 넘어서야 할 벽이자, 끝내 시선에서 떼어낼 수 없는 동경의 대상이다. 중학교 결승전 도중, 다민은 경기장에서 쓰러진다. 선천성 심장 질환. 그날 이후 다민은 선수 생활을 접고, 축구를 떠나야 한다. 재능은 남았지만 몸이 허락하지 않는 현실 앞에서, 그녀는 조용히 관중석으로 물러난다. 반면 준서는 다민이 멈춘 자리까지 대신 달리겠다는 듯, 축구에 매달린다. 두 사람의 관계는 경쟁에서 침묵으로 바뀐다.
Prologue. 킥오프 (Kick-off)
성인이 된 다민은 이식 후 정기 검진을 받는 날이면 늘 같은 질문을 받았다.
“혹시 이유 없이 감정이 요동치거나, 설명할 수 없는 기억이 떠오르나요?”
다민은 잠시 생각하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감정 변화는 모르겠고요. 이상하게 축구 생각만 나요. 제가 배운 적 없는 타이밍이 떠오를 때가 있어요.”
의사는 차트에 메모를 남겼다. ‘기억 전이 가능성 낮음.’
다민은 진료실을 나서며 왼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규칙적이고, 힘찬 박동.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낯설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0대 0이었다. 같은 동네, 같은 산부인과, 같은 O형. 심지어 생일마저 같은 운명. 하지만 호각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신은 그녀에게 천재적인 재능을 주었고, 나에게는 그녀를 쫓아갈 튼튼한 두 다리만을 주었다. 이 이야기는 승부가 나지 않은 우리의 지루하고도 슬픈 연장전에 관한 기록이다.
Episode 1. 전반전: 라이벌의 시작 (First Half)
[Side A] 강준서의 시선: 악몽의 5대 2
초등학교 6학년 가을 체육대회. 운동장엔 만국기가 펄럭였고, 결승전은 우리 1반과 다민이네 2반의 대결이었다. 나는 주장 완장을 차고 중앙선에 섰다. 건너편에는 다민이가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서 있었다.
"야, 성다민. 오늘이야말로 어릴 때 못 가린 승부를 가리자." 내가 비장하게 말하자 다민이가 코웃음을 쳤다. "승부? 난 너한테 졌던 기억이 없는데?"
휘슬이 울렸다. 나는 그 말을 갚아주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렸다. 다민이가 멍하니 서 있는 틈을 타 쏜살같이 드리블을 했고, 전반 5분 만에 선취골을 넣었다. 기세를 몰아 추가 골까지 터뜨렸다. 스코어는 2대 0. 나는 다민이를 보며 으스댔다. "봤냐? 이제 네 시대는 끝났어."
그러자 다민이가 묶고 있던 머리끈을 고쳐 매며 싸늘하게 웃었다. "그래? 이제 핸디캡 줬으니까... 진짜 시작한다?"
그 뒤로 펼쳐진 건 악몽이었다. 다민이의 발끝에서 공이 춤을 췄다. 코너킥에서 휘어 들어오는 바나나킥, 수비수 키를 넘기는 오버헤드킥, 골키퍼 손이 닿기도 전에 꽂히는 총알 슛. 심지어 만화에서나 보던 타이거 슛이라며 내지른 강슛에 골망이 찢어질 뻔했다. 순식간에 2대 5. 우리의 처참한 패배였다.
경기가 끝나고 넋이 나간 나에게 다민이가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봐주니까 기분 좋았냐? 짜식." 녀석은 환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분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흰 천에 매직으로 ‘타도 성다민’이라고 써서 머리에 두르고 놀이터로 나갔다. 가로등 아래서 슛 연습을 하고 있는데 다민이가 나타났다. "야, 그게 뭐냐? 촌스럽게 글씨가 그게 뭐여." 다민이는 내 머리띠를 보고 깔깔대더니, 자신의 분홍색 헤어밴드를 자랑스레 가리켰다. "승자의 머리띠는 이런 예쁜 걸 하는 거야. 알겠냐, 패배자 강준서?"
[Side B] 성다민의 시선: 핑크빛 도발
준서는 참 단순하다. 2골 좀 넣었다고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을 짓다니. 사실 초반에 좀 봐준 건 맞다. 녀석이 얼마나 늘었나 궁금하기도 했고, 기를 좀 살려주고 싶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네 시대는 끝났다"는 말에 스위치가 켜져 버렸다.
'감히 누님한테 도발을 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쏟아부었다. 바나나킥, 오버헤드킥, 그리고 아빠한테 배운 무회전 강슛(일명 타이거 슛)까지. 녀석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걸 보니 속이 시원했다. 5대 2. 압승이었다. "봐주니까 기분 좋았냐? 짜식." 분해하는 준서의 얼굴이 꽤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날 밤, 집에 가는데 놀이터에서 쿵, 쿵 공 차는 소리가 들렸다. 가보니 준서가 '타도 성다민'이라고 쓴 꼬질꼬질한 흰 머리띠를 두르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바보. 저런다고 날 이길 수 있을 줄 아나. 나는 일부러 녀석에게 다가가 내 분홍색 헤어밴드를 보여줬다. "승자의 머리띠는 이런 거야."
사실은 말하고 싶었다. '열심히 해라, 강준서. 그래야 내가 계속 뛸 수 있으니까.' 그날 달빛 아래서 분홍색 헤어밴드는 유난히 반짝거렸다.
Episode 2. 반전 종료, 그리고 비극(The Collapse)
[Side A] 강준서의 시선: 넘을 수 없는 벽
여름의 습기가 잔디 위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날이었다. 초등학교 마지막 지역 예선 결승. 스코어는 1대 1.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센터 서클을 노려보았다. 저만치 앞에 등번호 10번, 성다민이 있었다. 170cm까지 훌쩍 커버린 다민이는 이제 내가 올려다봐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여자라는 이유로 체력적인 한계가 올 거라 믿었던 내 기대는 오만이었다. 녀석은 후반전이 끝나가도록 지친 기색 하나 없었다.
2026.01.09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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