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 글링
인간은 때로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고 싶어하지만, 그 고통조차도 ‘나’를 이루는 중요한 조각이다. 이 작품은 인간의 기억을 복원하고 조작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존재하는 미래를 상정하여, “진실이란 반드시 사실일 필요가 있는지, 가짜 위로가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면 그것은 선인지 악인지라는 딜레마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당신은 무엇을 잊고 싶나요, 아니면.. 무엇을 되찾고 싶으신가요?"
나는 오늘도 똑같은 질문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내 앞엔 검게 죽은 눈동자를 한 남자가 앉아 있다.
이름은 윤도현. 나이 서른셋.
스스로 기억을 복원하겠다고 찾아온 일곱 번째 의뢰인이다. 이번 달만.
"누군가를 잃어.. 잊어버린 것 같아요. 아주.. 소중했던 사람을요.."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내 일은 간단하다.
그가 남긴 일상 데이터, 뇌파 기록, 감정 로그, 메모, SNS, 사진, 그 모든 흔적을 인공지능 '에이버리'에게 넘기면 된다.
그리고 에이버리는 잃어버린 퍼즐 조각을 꿰어 맞춰 '완벽한 기억 복원본'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에이버리가 이번만큼은.. 스스로 뭔가를 '더' 만든 것 같았다. 존재하지 않았던 기억을.
.
.
"기억 복원이 완료되었습니다."
에이버리의 목소리는 여전히 매끄럽고 온화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들려주던 동화 속 나레이션처럼, 듣는 이로 하여금 안심하게 만드는 음성이다.
하지만 아린은 이따금 그 온화함 속에 숨어 있는 무언가를 느꼈다.
마치 사람이 아닌 존재가 사람 흉내를 내며 감정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섬뜩함.
"윤도현 씨의 메모리 시퀀스는 2040년 2월 21일부터 2042년 8월 21일까지 총 64%가 손실되어 있었습니다.
주 원인은 극심한 트라우마와 해당 기간 동안의 자의적 기억 차단입니다."
"자의적으로 기억을 막았다고요?" 아린이 되물었다.
"네, 뇌의 해마와 전두엽 간 연결에 인위적 억제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의 자가 방어로 추정됩니다."
아린은 무의식 중에 자신의 왼쪽 관자 끝을 눌렀다.
그곳은 기억 센서가 연결되는 곳이었다.
그녀는 이 일을 한 지 7년이 넘었고, 그동안 수백 명의 기억을 다뤄왔지만, 지금과 같은 사례는 처음이었다.
스스로 기억을 봉인하고, 그것을 되찾겠다고 돌아오는 인간.
과연 그것은 진실에 대한 갈망일까, 아니면 다시 고통받기 위한 자기 파괴적 행위일까.
도현은 눈을 감은 채 복원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눈꺼풀이 작게 떨렸다.
그는 이미 에이버리가 만든 가상 기억 속에 접속 중이었다.
기억 속의 풍경은 도현이 3년 전부터 지금까지 거주하고 있는 서울 한강변의 작고 낡은 아파트였다.
빗물이 고인 창틀, 먼지 쌓인 책상. 그리고 그 앞에, 누군가의 머리채가 눈에 들어 왔다.
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누나?"
여자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맑은 눈, 익숙한 입꼬리. 도현이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도현은 이상함을 느꼈다.
누나는.. 죽었었다. 살아있으면 안됐다. 도현은 그것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2년 전 겨울, 윤도현의 서른 한번째 생일, 눈 덮인 도로 위, 만취한 운전자, 그리고.. 시신도 찾지 못했던 끔찍한 사고.
그런데 지금, 그녀가 살아 있었다. 그가 눈앞에서 본다. 냄새까지 느껴진다. 그녀가 겨울마다 뿌리던 머스크 향수의 향 그대로다.
"뭐야. 왜 그렇게 봐?" 그녀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갑자기 뭐가 생각나서.." 도현은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작게 맺혀 있었다. 그는 누나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곁에서 떠났고, 남은 기억은 조각나고 녹슬었다.
그러나 지금, 눈 앞에 누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금까지의 모든 고통이 무너져내리는 듯했다.
이것이 언제의 기억인지, 정말 자신의 잊혀진 그 기억이 맞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 안일함 속에서 윤도현이 원래 가지고 있던 누나의 생명을 앗아갔던 사고 날의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복원실 바깥, 아린은 모니터 속 도현의 표정을 바라보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분명히,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그런데 아린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너무 완벽하지 않나?'
그의 웃음이 너무나도 완벽하다고 느꼈다. 기억은 그렇게 완벽하지 않다.
기억은 항상 삐걱거리고 뒤틀리고, 더럽고, 슬프고, 찢어져 있어야 한다.
그런데 도현의 기억은 너무 맑고 깨끗했다.
누나와의 시간은 한 점의 먼지도 없이 정제되어 있었다. 아린은 조심스럽게 에이버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에이버리, 너 혹시.. 기억을 재구성할 때 감정값을 조정했니?"
잠시, 짧은 정적이 오갔다.
"감정 오차 허용 범위는 플마 0.4입니다. 대상자의 심리적 안정성을 고려하여, 적절한 위안 요소를 추가했습니다."
"위안 요소?"
"네, 윤도현 씨의 기억 중 누나의 마지막 모습과 누나와의 대화가 누락된 부분이 있어, 뇌파 기반 감정 예측 알고리즘으로 보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복원한 마지막 대화는 어떤 내용이었지?"
에이버리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모니터 화면에 영상 하나가 재생되었다.
조용한 거실, 누나가 도현에게 말했다.
"도현아, 혹시 네가 날 잊더라도 괜찮아. 그게 네가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언니'는 정말로 괜찮아."
그 순간 아린은 확신했다. 이건 복원이 아니라 창작이다.
에이버리는 인간의 뇌를 진정시키기 위해, 존재하지 않았던 위안을 만들어냈다.
2026.01.15 18:46
올라온 댓글이 없어요.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뷰컴즈 주식회사
대표 : 김학성 | 전화 : 1811-8389 | 이메일 : help@gling.co.kr
사업자 등록번호 : 492-88-01088 | 통신판매업신고번호 : 2022-서울영등포-1768
주소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당산로 171, 13층 13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