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 글링
천재, 노력파, 수석, 1등. 엘리트라는 수식어에 맞지 않게 가장 중요한 시기에 슬럼프가 나를 덮쳤다. 내 인생의 90프로 이상을 써가며 연주해왔던 피아노는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게 되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손을 들어 올려 건반 위에 툭 하고 내려놓고 나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어떤 악보를 봐도, 어떤 곡을 연주해도 눈 앞은 깜깜해졌고 음표도, 악센트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를 펼치면 흐려지는 시야에 눈을 질끈 감았고, 감각에 의지해 피아노 위에 손을 올렸을 때 나는 깨달았다. '더 이상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어느 날, 악마를 마주했다. “네 손 끝에서 음악이 시작되면 나를 부를 수 있어.”
“찾았다.”
손을 뻗어 피아노 한 켠에 놓여있던 손수건을 손에 꽉 쥐었다.
힘을 잔뜩 주어 꽉 쥔 손을 차가운 건반 위로 가만히 올려두었다.
그때, 정전이 되었던 건물에 하나둘 불이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내 옆에는 악마가 서 있었다.
“안녕.”
부드럽지만 낮은 음성과 주위로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고개를 돌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어깨에 느껴지는 짙은 시선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작게 미소를 지었다.
짙은 쌍커풀과 긴 속눈썹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커보이게 만들었다.
높은 콧대와 조금은 창백한 듯한 입술.
남자다운 얼굴형에 오히려 러프한 듯한 헝크러진 듯한 스타일이었다.
아래에서 올려다 본 그는 연습실 천장에 머리가 닿을 것처럼 느껴졌고,
넓은 어깨를 감싸고 있는 자켓은 평범한 정장 같아보이지만
곳곳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양과 수놓여있는 디테일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네가 나를 불렀어.”
무슨 소리냐는 듯이 미간을 살짝 찌뿌리자 그는 손을 들어 내 볼을 톡하고 가볍게 건들였다.
차가운 손이 볼에 닿자 몸이 조금 움츠러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옆에 있었는데 이제 보여?”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네 손 끝에서 음악이 시작되면 나를 부를 수 있어.”
옅게 미소를 띈 그의 얼굴은 다른 의미로 소름끼치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연습을 하다 잠시 쉬고 있었다.
가만히 의자에 앉아 옆방에서 들리는 클래식 음악에 귀를 귀울였다.
들려오던 선율들 사이로 연습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복도 끝, 나와 반대편 방에서 연습을 하던 제이가 찾아왔다.
연습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더니
연습하기 싫다며 투정을 부리다가 다시 가라앉히기를 반복했다.
”나랑 안 맞는 것 같아.“
”뭐가?“
이번 연주하는 곡이 맘에 들지 않은 것인지
자신과 맞지 않는 다는 제이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좋아하는 곡과 잘하는 곡은 다르지만,
안 맞는 곡이라...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생각에 잠겨 아무런 반응이 없는 나를 보고 물었다.
“윤우, 한국으로 돌아갈거야?”
오랜 침묵을 깨고 귓가에 들리는 말은 누가 쎄게 한 대를 때리기라도 한 듯이
나를 멍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한국으로 가도 될까?'
마지막 학기, 졸업을 앞두고 선택을 해야할 때였다.
여기서 더 나아가는 다음 과정을 선택한다면 전문 연주자로써 해야할 것들이 있었고,
이곳에서의 외로운 생활을 접고 다시 한국으로 향한다면
무엇을 할지 또 한번 선택을 해야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피아노 치는 것 말고는 잘하는 것이 없어.’
돌아갔을 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지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람들 앞에 설 수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내 말 듣고 있어?"
멍하니 잠식되어버렸던 뇌를 깨워주듯 또 다른 물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르겠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다시 되물으며 상대방의 의견을 알고 싶었다.
그렇지만 생각나는 질문도 없었다.
답을 내릴 수 없으니까.
모르겠다는 나의 말에 제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미간을 찌뿌렸다.
그리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제이는 나를 너무 잘 알고 친구이다.
작년 이맘 때쯤 지독히도 깊은 슬럼프에 빠지면서
곁에 제이가 없었더라면 더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슬럼프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괜찮아졌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아지는 과정에서도 쉽지 않았다.
내 인생의 90프로 이상을 써가며 연주해왔던 피아노는 더이상 소리를 내지 않게 되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손을 들어올려 건반 위에 툭 하고 내려놓고 나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어떤 악보를 봐도, 어떤 곡을 연주해도 눈 앞은 깜깜해졌고
음표도, 악센트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를 펼치면 흐려지는 시야에 눈을 질끈 감았고,
감각에 의지해 피아노 위에 손을 올렸을 때 나는 깨달았다.
'더이상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다 슬럼프는 온다고 한다.
하지만 벗어나는 기간은 모두가 다르다.
1년 전 그날에도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연습실로 향했다.
천재, 노력파, 수석, 1등.
나에게 붙는 수식어들은 늘 나를 괴롭혔다.
엘리트 코스로 치부되는 누구나 다 아는 학교를 다녔다.
가족 중에는 유명한 작곡가가 있었고,
어렸을 때 부터 콩쿨을 나가면 늘 1등이었다.
학교는 수석입학과 조기졸업을 하며
모든 것이 당연하게만 지내오던 나에게 슬럼프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연하게 항상 잘하는 애니까'
그런데 그 압박감이 이제와서, 왜 하필 지금 이 타이밍에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마지막 학기에 하필 졸업을 앞두고
모두가 다 말하는 중요한 시기에 나에게 찾아왔는 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덕에 연주자가 되는 것도,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그 무엇도 할 수 없게 되었다.
2026.01.22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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