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빛 하나 없는 공간에서 한 남자가 눈을 잃은 채 깨어난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곳에 있는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던 중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타인의 시야를 통해 세상을 보게 된다. 그 시야의 주인은 기억을 잃은 한 소녀다. 두 사람은 감각과 목소리가 이어진 기묘한 연결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인식한다. 소녀의 일상에는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어른과 닫힌 공간이 존재한다. 연결이 깊어질수록 두 사람의 몸과 기억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이 찾아온다. 잊힌 기억의 조각들이 서서히 떠오르며, 둘은 자신들이 단순한 우연으로 이어진 존재가 아님을 깨닫는다. 어둠 속의 남자와 빛 속의 소녀는 각자의 자리에서 진실에 다가가려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두 사람의 삶을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이끈다.
창석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고 있다는 자각은 분명히 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빛도, 형체도, 색도 없었다. 시야라는 개념 자체가 지워진 것처럼, 세상이 완벽하게 막혀 있었다. 마치 눈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는 그저 이 상황이 꿈이거나, 혹은 방금 막 잠에서 깨어나는 과정이기를 바랐고, 조금의 변화라도 일으키려 했다. 눈을 다시 감았다가 떴다. 한 번 더, 또 한 번 더. 그러나 여전히 어두웠다. 어둠은 조금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에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캄캄한 어둠에 대한 공포보다 그에게 먼저 찾아온 것은 다름 아닌 혼란이었다. 그건 그가 눈을 깜빡이는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했을 때였다. 눈꺼풀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눈이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 같았다. 그는 의식적으로 눈을 움직이려 애썼다. 평소라면 아무 생각 없이 하던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옮기려는 얼굴 방향만이, 허공을 공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감각에 잠시 안도했지만, 이내 공기가 폐를 누르는 막힘이 느껴졌다. 그곳의 공기는 여느 습지보다 눅눅했고, 오래된 쇠가 녹슨 냄새와 피 섞인 냄새가 코를 강하게 찔렀다. 숨을 가쁘게 쉴수록 그 냄새는 더 선명해졌다. 일반적인 동네 병원의 소독약 냄새와도, 평온한 집 안의 공기와도 완전히 다른 냄새였다. 이곳은 사람이 머물러야 할 장소가 아니라는 감각이, 천천히 그의 몸을 잠식해왔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머리 위부터 더듬었다. 혹시 무언가로 가려져 있는 건 아닌지, 얼굴이 온전한지 확인하려는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이마, 콧대, 뺨. 그리고 눈이 있어야 할 자리까지. 그의 손끝이 안와 사이로 닿은 순간,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이 몸을 관통했다. 거기에는 눈이 없었다. 대신 움푹 파인 자국과, 거칠게 일그러진 표면만이 손끝에 닿았다. 그는 그곳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감각이 사라질까 봐서가 아니라, 이 촉감이 현실임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친 것이라 믿으려 했다. 크게 다쳐서 붕대를 감았고, 그래서 만져지지 않는 것뿐이라고. 잠시 후면 괜찮아질 거라고. 누군가 이 어둠 속에서 자신을 부르며 다가올 거라고.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이 상황을 견딜 방법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설득하며, 아직 벌어지지 않은 장면을 상상했다.
‘그런데 누가…?’
그가 자신을 찾아올 누군가를 떠올리려는 순간, 그 믿음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아무 얼굴도, 아무 이름도 떠오르지 않았다. 가족도, 친구도, 자신조차도. 정신은 분명 존재하는데, 기억만 깔끔하게 도려낸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살아 있다는 감각만 남은 채, 삶의 중심은 텅 비어 있었다.
그제야 숨이 무너졌다. 억눌러 두고 있던 공포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뭉쳐 있던 고통 속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목이 찢어질 듯 소리를 질렀지만, 그 소리는 벽에 부딪혀 되돌아올 뿐이었다. 방은 지나치게 조용했고, 그의 절규를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삼켜버렸다. 이곳에는 응답할 존재가 없다는 사실이, 그를 더 깊은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는 차디찬 바닥을 더듬으며 몸을 낮게 웅크렸다. 이 자세가 조금이라도 안전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릎을 끌어안고 몸을 접었지만,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눈물이 흐를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눈이 없으니, 눈물조차 흘릴 수 없다는 사실을. 그 단순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어떻게든 기억을 붙잡으려 애썼다. 이름, 나이, 살아온 시간. 무엇이든 좋으니 단서 하나라도 떠올리려 했지만, 머릿속은 끝없이 비어 있었다. 오직 무언가를 잃었다는 감각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몇 번이나 잠들었다 깼다. 혹시 잠에서 깨어나면 이 모든 게 사라질까 기대했지만, 어둠은 그대로였다. 시간이 흐르는지도 알 수 없었고, 배고픔과 갈증도 점점 희미해졌다.
그러다 바닥을 더듬던 손에 차가운 물기가 닿았다. 손끝에 남은 축축한 감각에 그는 움찔했다. 누군가 이곳에 온 적이 있다는 흔적. 이 공간이 완전히 버려진 곳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러나 그 사실은 안도보다 더 큰 공포로 다가왔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여길 알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 순간, 공간이 흔들렸다. 아주 미세한 균열처럼, 진동이 느껴졌다. 텅 비어 있는 안와 깊숙한 곳에서부터 시작된 떨림이었다. 처음에는 흐릿한 빛이었다. 점처럼 번지던 것이 서서히 형태를 띠었다. 희미한 움직임, 마치 페인트가 물 위에 번지듯 일그러지는 형상.
그는 눈이 없음에도, 눈을 뜨지도 않았음에도 보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감각에 속이 울렁거렸다. 시야는 그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움직였다. 눈자위를 굴릴 수도, 멈출 수도 없었다. 이건 ‘보는 것’이라기보다, 누군가의 시선을 강제로 따라가고 있는 감각에 가까웠다.
낡은 병실이 보였다.
창가로 스며드는 햇빛, 뿌연 먼지가 떠다니는 허공. 너무도 선명한 풍경에 그는 숨을 삼켰다.
그것은 환각이 아니었다.
시야가 깜빡였고, 그는 이 시야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누군가의 눈을 빌려 보고 있다는 직감이 등골을 타고 내려왔다. 쉰 목소리가 허공으로 흘러나왔다.
“저, 누구시죠?”
그는 자연스레 움직이는 시야만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 좀 도와주세요.”
그때, 소녀 같은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아저씨, 누구예요?”
창석은 거친 숨을 삼켰다.
눈은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분명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연결은 희망이라기보다는, 끊어지지 않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아주 가느다란 실마리에 불과했다.
그는 유일한 희망인 그녀를 놓칠 수 없었다. 그 사실 하나만이, 그를 이 어둠 속에 붙잡아 두고 있었다. 꽉 막힌 입을 겨우 열었다.
“나, 나는….”
그러나 그는 말을 더 이어갈 수 없었다.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훨씬 잔혹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름도, 과거도, 설명할 수 있는 단서조차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소개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말끝이 허공에서 맴돌다 사라졌다.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한 듯,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아저씨는 누구예요?”
절망 속에 멈춰 있던 그의 시야가 낮은 각도에서 천천히 위를 올려다보았다. 형광등 불빛이 시야 위쪽에서 번지듯 퍼졌고, 그 아래로 어느 한 남자의 얼굴 윤곽이 흐릿하게 깎여 나왔다. 사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깔끔하게 다려진 각진 셔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단정한 머리. 그리고 상황과 어울리지 않을 만큼 지나치게 침착한 눈망울.
그 연속된 질문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창석은 늦지 않게 알아차렸다. 소녀의 시선은 그가 아닌, 눈앞에 서 있는 중년 남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남자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부드럽게 풀렸다.
“보아야.”
그 남자는 동굴처럼 낮고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잖니.”
시야가 좌우로 빠르게 흔들렸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기울인 것이었다. 기억을 더듬는 듯한 그 짧은 움직임 사이로, 특유의 공백이 창석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무언가를 붙잡으려다 놓친 사람처럼,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아… 아빠?”
“그래, 우리 딸.”
남자는 걱정과 안도의 감정이 절묘하게 섞인 웃음을 지었다. 그 표정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위화감을 만들었다. 그는 두껍고 거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직 많이 혼란스럽지? 수술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래.”
2026.01.31 22:32
2026.01.31 22:31
2026.01.31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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