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장과 책임 속에 고립되어 살아가던 북부 대공 루이 클로드아. 그에게, 어느 날 황실은 뜻밖의 명을 내린다. ― 남부 최고의 명문, ‘해가 지지 않는 가문’ 발보아가의 영애와 혼인하라는 것. 국가의 위기마다 앞장섰던 대영웅 루이를 오래 동경해 온 에카테 발보아는, 그 마음 하나로 눈보라를 헤치고 북부에 도착한다. 조용히 잊혀지길 바랐던 대공의 삶은 예상치 못한 영애의 등장과 함께 산산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눈보라 속 북부 성에서 펼쳐지는 정략결혼 × 일방적 직진 × 대공님 멘탈 붕괴 로맨틱 코미디! 과연 루이는 이 혼란스러운 혼인과 영애의 역공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
폭풍우가 몰아치기 직전이어서 그런가, 최근 며칠 동안 북부에는 눈 대신 차갑고 맑은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한 해의 절반은 눈 속에 파묻혀 버리는 북부의 고원은 앞으로 다가올 겨울을 대비하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모피와 식량을 실은 대열이 회백색 평원을 가로질러 성을 향해 나아갔다. 선두에는 사냥으로 인해 피를 뒤집어쓴 루이 클로드아 대공이 있었다. 외투 사이로 드러난 얼굴엔 피로도, 감정도 없었다.
성벽이 보이자, 기병대는 속도를 늦췄다. 말들의 숨결이 희게 피어오르고, 굳은 흙먼지가 발굽 아래서 깨졌다. 철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열리자 차가운 바람이 성안으로 밀려들었다.
병사들은 성문을 통과하자마자 곧장 자신의 자리로 흩어져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짐을 내리고 무장을 풀어 중정을 정돈하는 일련의 동작까지, 어느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러나 성안의 공기는 대공의 귀환 소식에 이미 술렁이고 있었다. 루이가 말에서 내리자마자, 성안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신하들이 개척과 식량, 마수 관련 보고서를 들고 루이에게 몰려들었다. 서로 먼저 보고하겠다며 중정 앞이 혼잡해지던 그때,
"대공님, 남부에서 파발이 도착했습니다!"
그 한마디에, 차갑게 식어 가던 루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여러 보고가 뒤섞여 울리던 소란이 순간적으로 멀어지는 듯했다.
“······남부?”
루이는 주변의 신하들을 손짓으로 물리고, 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알렉에 관한 건인가?”
목소리는 낮고 단조로웠지만, 말끝에 스며든 기대만큼은 감추지 못했다.
"아닙니다…. 하오나 발보아 가문에서 왔습니다.
직접 대공님께 전달드려야 할 것이 있다 하옵니다."
루이는 사냥 내내 북부의 한기를 막아내지 못했던 장갑을 거칠게 벗어 던졌다. 추위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짧게 숨을 고른 루이는 다른 신하를 향해 물었다.
"....식량 문제는 해결됐나."
뒤에 서 있던 다른 신하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잠시 주저했다가, 이내 또렷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직 정확한 수량은 집계 중입니다.
보충될 가능성은 있지만… 지금으로선 속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럼, 남부의 문제는 뒤로 미뤄라."
루이의 단호한 목소리가 중정을 가로질렀다. 하지만 보고하던 자는 여전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망설임이 얼굴에 역력했다.
"대공님, 사절단이 발보아의 권세를 앞세워 응접실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누구도 감히 제지하지 못해… 급히 아뢰는 바입니다.”
하아… 발보아 가라니.
두 세대 전에는 황후까지 배출한 황실 인척가이자, 남부의 최정점에 선 가문.
신생 봉토에 불과한 북부에서, 그 이름 앞에 정면으로 나설 수 있는 이는 손에 꼽혔다.
루이의 시선이 그를 천천히 훑었다. 그 냉담한 눈빛에 주변 신하들의 숨소리마저 멎어버렸다. 이 바쁜 시기에, 대체 무슨 일로 발보아가 북부까지 비집고 들어온 것인지.
“…길을 비켜라.”
짧은 명령에 신하들이 힘없이 갈라졌다. 루이는 하는 수 없이 그들을 지나쳐 응접실 쪽으로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
공작의 사저라기엔 을씨년스러운 응접실. 그 안에서는 북부를 괄시하는 말들이 벽을 타고 새어 나오고 있었다.
쿵—!
루이는 거의 밀어 부수듯 문을 젖히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말소리가 끊겼다. 화려한 외투와 금빛 견장을 두른 사절단의 움직임 또한 멎었고, 방금 전까지 방을 장악하던 얼굴 위로 불쾌함이 스쳤다.
"황국의 수호자, 북부 영토의 수장, 루이 클로드아 대—”
사절단의 형식적인 합창이 시작되려던 바로 그 순간,
털썩.
루이는 피와 한기로 얼룩진 외투를 아무렇게나 등받이에 내던져 놓았다. 젖은 모피가 무겁게 떨어지는 소리에, 인사의 절반이 공중에서 잘려 나갔다.
루이는 아무렇지 않게 소파에 몸을 묻고, 사냥터의 진창과 피를 그대로 밴 부츠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검붉은 얼룩이 탁자를 타고 번져갔다.
“설원에서 그 꼴을 하고도 용케 디어울프의 먹잇감이 되지 않았군.”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지만, 루이의 얼굴 위로 희미한 조소가 스쳤다.
“그래서, 무슨 연유로 이 황량한 끝자락까지 기어 왔지?”
루이의 태도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허세로 가득하던 사절단의 기세가 하나둘 지워지기 시작했다. 대표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발보아 공작가의 차녀, 에카테 발보아님의 서한을 전하러 왔습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루이는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대표는 형식을 지키려 애쓰며, 화려하게 장식된 두툼한 봉투를 꺼내 조심스럽게 루이의 손에 올려놓았다.
봉투를 받아 든 루이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인장을 부쉈다. 왁스가 산산이 흩어졌고, 편지가 무심히 찢겨 나왔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읽어 내려간 첫 문장부터 편지의 성격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 이 소녀, 에카테 발보아는 이제 막 북부의 땅으로 진입하였답니다…
곧 혼인 서약을 나누게 된다는 것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
한참을 읽어 내려가던 루이는 순간, 글줄이 흐릿해지는 것 같은 착시가 스쳤다.
혼인…?
누구와, 누구의…?
급히 전달해야 할 문서라 했으니 외교적 통보쯤이라 짐작했건만. 그러나 손에 들린 것은 정식 문서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사적인 편지였다. 동글동글한 글씨에는 애정과 기대와 설렘이 구분 없이 뒤엉켜 있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혼인’이라는 단어는 마치 오래전부터 약속된 연인 사이에서 쓰여 온 말처럼 아무렇지 않게 반복되었다. 그럴수록 루이의 손끝에는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그놈의 ‘곧 아내가 될’이란 단어가 나올 때마다 미간이 구겨졌다.
“……이게 지금 다 뭐지?”
루이는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그 눈빛이 방 안을 한 바퀴 훑는 동안, 공기는 눈에 띄게 무거워졌다.
“다시 한번 묻겠다.”
목소리는 낮았고, 차분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감히— 무슨 용건으로 이 땅에 발을 들였지.”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루이의 전신에서 금빛 오러가 치솟았다. 사절단은 본능적으로 한 발 물러서려 했으나, 곧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숨이 눌린 듯 가슴이 조여 왔고, 어깨와 팔다리는 이유 없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2026.02.10 00:18
올라온 댓글이 없어요.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뷰컴즈 주식회사
대표 : 김학성 | 전화 : 1811-8389 | 이메일 : help@gling.co.kr
사업자 등록번호 : 492-88-01088 | 통신판매업신고번호 : 2022-서울영등포-1768
주소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당산로 171, 13층 13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