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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의 아틀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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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율채
1화무료 1화
자유 연재 | 글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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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아름다운 한적한 시골 마을 벨리르. 그리고 그곳에서 홀로 자신만의 세상을 그려내는 화가 '마리에트 로지에'. 귀족 태생이지만 자신을 옭아매는 규율을 벗어던지고 자유를 찾아 가문을 떠난 그녀의 평화롭던 일상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벨리르의 주인, 리브리에 후작, '라일 리브리에'로 인해. 자유를 가져본 적이 없으나 그 공백조차 느끼지 못하며 살아왔던 그는 자신의 상식 밖에 있는 마리에트를 보며 강렬한 이끌림을 느낀다. 그녀가 쟁취한 자유가, 그리고 자유를 만끽하는 그녀가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를 취하고자 했다. 가장 더럽고, 추악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로맨스판타지#서양풍#가상시대#피폐물#복수#예술가#털털녀#평범녀#계략녀#계략남#후회남#집착남#오만남#나쁜남자

1화: 조개 물감

벨리르 강 유역을 따라 걷다 보면 보이는 오솔길의 끝. 작은 오두막 하나가 보인다. 마리에트는 오두막 앞의 우편함에서 편지를 꺼내 들었다.

'벨벳 재질의 고급 봉투... 이건 어머니가 보낸 거 같고... '

이건 나중에 읽자. 그녀는 편지 봉투를 다시 우편함에 쑤셔 넣어버렸다. 마리에트는 지금의 행복한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경첩이 녹슬었는지, 오두막의 문은 조금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종이 냄새와 먼지 냄새, 말려놓은 꽃의 은은한 향기. 그녀가 사랑하는 냄새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코끝을 간지럽혔다. 오두막 내부는 발 디딜 틈도 없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사방에 널려있는 이젤들과 캔버스, 조각하다 만 나무 조각들 탓에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집 안이 엉망이 될 것 같았다. 그녀는 개의치 않고 익숙한 듯 움직이며 시장에서 사 온 물건들을 찬장 위에 쑤셔 넣었다. 딱 하나만 빼고.

"음, 좋은 냄새."

장미 꽃잎으로 만든 잼의 병뚜껑을 슬쩍 열어본 그녀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홍차와 함께 먹으면 그렇게 향이 좋다나. 물감 하나를 새로 살 수도 있을 만큼 비싼 값을 줬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는 것만큼 차를 마시는 시간을 사랑했다. 그녀는 찻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찬장 높은 곳에서 찻잎을 꺼냈다. 마을 최고의 인기 빵집에서 사 온 카넬레 하나도 예쁜 접시 위에 올려 꺼내 두었다.

"흠~ 흠흠~"

콧노래까지 부르며 혼자만의 티타임을 준비하던 그때.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계십니까?"

"... 네, 나갑니다."

썩 달갑지 않은 타이밍의 방문이었지만, 혹시 모르지 않는가. 작품을 사러 온 손님일 수도 있으니, 표정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어떤 일로 오셨을까요?"

마리에트가 친절하지만 과하게 밝지는 않은, 영업용 목소리를 장착하고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누가 봐도 귀족의 사용인처럼 보이는 이가 서 있었다.

"작품을 좀 보려고 합니다."

멀끔한 정장 차림과 친절하고 신사적으로 보이지만, 눈빛에 스며들어있는 묘한 우월감. 불편하다 못해 짜증이 솟구치게 만드는 눈빛이었다.

'귀족치곤 허술하고, 평민치곤 지나치게 건방진 꼴이 딱 사용인이네. 그래봤자 근처 영지 귀족가의 식솔일 텐데, 그럼 라카드 백작가의 사용인이려나?'

"... 귀족 분들 취향에 맞는 작품이 있을까 걱정되네요. 일단 들어오시죠."

남자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며 아틀리에 안으로 들어왔다.

'참나, 이 정도 먼지 가지고 유난은.'

마리에트는 그런 남자의 뒤통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귀족이라도 된 듯한 저 태도, 재수 없어. 허구한 날 나무나 깎는 작업실에 먼지 좀 날리는 게 대수라고.

"백조, 아직 남아있습니까?"

"아, 백조... 여기 어디 있을 건데."

아무래도 얼마 전에 번화가의 작은 살롱에서 했던 전시회에서 그림을 보고 왔나보다. 마리에트는 헤이즐빛 머리를 헝클이며 주변에 널부러진 캔버스들을 살폈다.그림을 팔려면 전시라도 몇 번 해야 하지 않겠냐는 서점 주인 알리야의 설득 때문에 마지못해 했던 전시회였는데, 효과가 있긴 했나 보다.

'백조... 백조... 어디다 뒀더라.'

거창한 제목을 붙이기는 뭐해서 대충 백조라는 제목으로 출품했던 그림이었다.

"아, 찾았다."

마리에트는 구석에 처박혀있느라 그새 먼지가 쌓인 캔버스 위를 손수건으로 슥슥 닦아내고 남자에게 내밀었다.

"찾으시는 그림. 이거 맞죠?"

남자는 약간 미간을 구겼다.

"... 예, 이 그림 맞습니다."

마리에트는 왜 안받고 있냐는 듯 그림을 남자에게 떠넘기듯 던져주고는 손을 내밀었다.

"7실링이요."

남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림을 꼼꼼히 살펴보더니 재킷 안주머니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건넸다.

"거스름돈은 됐습니다. 주인님께서 잔돈을 싫어하셔서."

남자는 인사는 됐다는 듯 홱, 몸을 돌려 문밖을 나섰다.

"거스름돈은 됐숩니다~ 으휴, 재수 없어."

마리에트는 남자가 남긴 말을 과장해서 따라 하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었다. 유난스럽고, 가증스럽다. 딱 질색이야.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다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마시곤 주머니 속을 들여다봤다.1파운드. 그녀가 제시한 금액의 세배 정도 되는 금액이었다.

"... 우와앗?! 이 정도면 두 달은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겠는데?"

이 작은 시골 마을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큰돈이었다. 단숨에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전시회를 하길 잘했네. 알리야한테는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겠어.'

사실 방금 사간 그 그림, 그다지 공을 들인 것도 아니고 전시회를 열려면 구색은 맞춰야 하니 급하게 작업했던 그림이었는데도 이 정도 벌이라니. 꽤 쏠쏠했다.

'안 그래도 요즘 사고 싶은 재료들의 값이 턱없이 비싸져서 고민이었는데...'

마리에트는 내일 다시 화방에 들러야겠다고 생각 하며 다 식어 눅눅해진 카넬레와 미지근한 차를 곁들인 티타임을 즐겼다.

*

"오늘도 왔네?"

작은 화방의 주인, 필립이 사다리 위에서 재료들을 정리하다가 마리에트를 발견하곤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찬장 위에 늘어놓은 유리병 속의 안료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마리에트는 왠지 모르게 의기양양한 얼굴로 필립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제 내가 본 그거, 아직 안 팔렸지?"

"조개 물감 말하는 거지? 이 시골 마을에서 그 비싼 걸 사 갈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

"그 사람이 바로 여기 있지."

마리에트는 우쭐대는 얼굴로 품속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묵직하게 짤랑거리는 소리에 필립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마리, 그게 다 얼마야?! 너 혹시... 어디서 훔쳐 온 건 아니지?"

"그걸 말이라고 하니? 어제 그림 하나를 팔았어. 나는 대충 7실링을 불렀는데, 1파운드나 주고 갔지 뭐야. 재수 없는 손님이긴 했지만, 용서해 주려고."

마리에트의 말에 필립은 마치 제 일이라도 되는 듯이 방방 뛰며 기뻐했다.그는 기다려보라며 창고에 들어가서 한참을 우당탕 소리를 내더니 작은 주머니를 하나 들고나왔다.

"열어봐도 돼?"

"당연하지, 이젠 네 건데."

주머니 안엔 곱게 빻은 하얀 가루가 가득했다. 조개껍질을 빻아서 만든 안료라던가? 동양에서 물감으로 사용하는 것이라는데, 필립이 어떤 재주를 부렸는지 화방에 들여왔다기에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물건이었다.

"물에 개어서 쓰면 된대. 다른 안료랑 섞어서 써도 괜찮고. 부드럽고 보송한 색감이 난다더라고."

"그래서, 얼마랬지?"

"원래는 10실링인데, 특별히 9실링에 줄게."

마리에트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1실링이나 깎아준다니, 1실링이면 일주일 집세를 낼 수도 있는 돈인데! 이런 작은 화방에서는 며칠을 꼬박 장사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다.

"필립, 너 1실링이 얼마나 큰 돈인지는 아는 거야?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그건 내가 미안해서 안 되겠어."

마리에트는 절대 돈을 받지 않겠다는 필립에게 기어코 10실링 전부를 온전히 쥐여주고 나서야 도망치듯 조개 물감이 담긴 주머니를 챙겨 화방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필립은 너무 착한 게 문제라니까. 저러다가 사기라도 당할까 봐서 걱정이야.'

마리에트는 마을에 온 김에 빵집에 들러 바게트와 스콘 하나를 사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강가를 따라 걸었다. 오늘따라 내리쬐는 햇빛이 간지러웠다. 반바지를 입은 마리에트의 발목에 닿아오는 풀잎들이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벨리르 강에서 헤엄치고 있는 백조들이 보였다. 어제 팔린 그림 때문일까, 오늘따라 백조들이 더 사랑스럽게 보였다.

'어서 가서 말려둔 능소화와 조개 물감을 섞어 물감을 만들어봐야지.'

벨리르 강가를 따라 걷다 보면 보이는 작은 오솔길. 그 끝에는 작은 아틀리에가 있다. 마리에트는 조금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익숙한 냄새가 섞인 공기가 코끝에 닿아오자, 마음이 한층 더 포근해졌다.그녀는 사 온 빵을 식탁 위에 아무렇게나 팽개쳐두고는 서둘러 작업대로 향했다. 그리고선 벽에 걸어 말려놓은 꽃잎을 유발에 넣고 곱게 갈아내기 시작했다.그르륵, 그르륵... 유발이 긁히는 소리와 은은한 풀 냄새가 온 집안을 물들이기 시작했다.몇 분이 지나 꽃잎이 어느 정도 곱게 갈린 뒤, 마리에트는 조심스럽게 조개 물감을 한 스푼 정도 유발 안에 넣고 다시 갈아내기 시작했다.그렇게 온 집안에 유발이 긁히는 소리만 가득하던 그 순간.덜커덩, 창밖에서 요란한 마차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이어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마리에트는 살짝 짜증이 섞인 한숨을 내뱉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어제부터 타이밍 한번 끝내주는구만. 가장 고대하는 순간마다 찾아오는 불청객들이라니.그녀는 문을 벌컥 열었다.마리에트는 문 앞에 서 있는 사내를 보았다.우아하고 꼿꼿한 자세, 물씬 풍겨오는 고급스러운 머스크 향수 냄새, 깔끔하게 접혀서 체스트 포켓에 꽂혀있는 행거치프까지... 모든 게 철저히 재단 되어 있는, 귀족적인 인상을 주는 남자였다.그녀가 살면서 본 남자 중에 가장 아름답고, 위험해 보이는 이였다.깊은 밤에 바라본 벨리르 강을 닮은 검푸른 머리를 가진 사내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여기가 마리에트 씨가 운영하는 아틀리에, 맞습니까?"





2화: 장미 정원과 백조



몇백 파운드는 거뜬히 들었을 법한 휘황찬란한 가구들과 완벽하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길러진 화분들로 꾸며진 응접실 한 가운데 앉은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눈다.

"언제 와도 참 황홀한 풍경입니다. 리브리에 저택의 장미 정원은 감히 황궁에 비견해도 뒤처지지 않는군요."

벨리르 인근 영지를 다스리고 있는 라카드 백작이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며 맞은편에 앉은 이를 추켜세운다.백작의 아첨을 들은 젊은 남자가 여유롭게 웃으며 대꾸한다.

"과찬이십니다."

백작의 아첨을 들은 남자, 벨리르를 다스리는 젊은 후작 '라일 리브리에'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나저나, 정말 영광이군요. 라카드 백작께서 이 먼 곳까지 직접 발걸음하시다니."

묘하게 뼈가 있는 듯한 후작의 말에, 백작은 꼴깍 침을 삼키며 찻잔을 내려놓았다.그러곤 소파 옆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물건 하나를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하하,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마침, 볼일이 있어 벨리르를 거쳐 지나가던 차였는데, 후작님을 뵙지 않고 그냥 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후작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테이블 위의 납작한 물건과 백작을 번갈아서 쳐다봤다.

"일단 열어보시지요. 벨리르 강 다리 근처에 있는 작은 아틀리에에서 파는 그림인데, 후작님이 생각나서 구매해 왔습니다."

"오, 그림이라. 제 취향을 잘 알고 계시는 군요."

그림이라, 뻔하고 식상한 선물이었다. 더 이상 저택에 걸어둘 자리도 없을 텐데. 후작은 백작의 선물 고르는 감각이 영 엉망이라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포장을 풀었다.뭐 뻔하지, 벨리르 강 근처라면 리브리에의 영지 중에서도 가장 외진 시골 아닌가. 그런 곳의 아틀리에에서 사 온 그림 따위엔 별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평온한 얼굴로 포장지를 뜯은 후작의 표정이 살짝 뒤틀렸다.리브리에 가문의 상징인 벨리르 강의 백조가 그려진 그림이었다.강가에 자라난 커다란 버드나무의 버들잎과,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강의 윤슬, 백조들의 새하얀 깃털까지.그 모든 소박한 풍경이 놀라울 만큼 섬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현실과는 거리가 먼 부드럽고 따스한 색채로 그려진 그 풍경이, 묘한 향수가 느껴지게 했다.그래, 벨리르 강의 여름은 이런 풍경이었지.

"... 좋은 그림이군요."

후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조용히 백작을 바라보며 입술을 뗐다.

"그 아틀리에, 정확한 위치가 알고 싶습니다."

*

백작에게 위치를 전해 들은 강가의 아틀리에는 지나치게 작고 소박했다.오두막 근처에는 이젤과 캔버스, 나무토막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고, 빨랫줄에는 직접 염색한 듯한 손수건들이 널려있었다.주변 풍경만 봐도 이 작디작은 아틀리에의 주인이 깔끔한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똑똑, 조심스럽게 두드려본 문 너머에서 우당탕 발을 구르는 듯한 소리가 났다.경첩에 녹이 슬었는지 문이 요란하게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작은 오두막 안에서는 묘한 먼지 냄새와 건조한 나무 냄새가 났다.먼지가 어찌나 많은지, 창문 너머에서 내려앉은 햇빛을 받은 먼지들이 반짝거리며 두둥실 떠다녔다.그리고 그 너저분한 풍경 가운데, 작은 여인이 서 있었다.어깨까지 걷어붙인 소매와 무릎 위로 올라오는 반바지라는, 굉장히 경박한 차림새를 한 여자였다.햇빛을 받으면 더 연해지는 헤이즐 빛 머리칼과 여름의 녹음을 닮은 짙은 녹색 눈동자가 묘하게 시선을 잡아끌었다.팔과 소매에 묻은 물감과 먼지는 그녀의 직업을 보여주고 있었다.뜨거운 벨리르의 여름 햇빛에 그을린 피부와 주근깨가 그녀를 묘하게 어려 보이게 했지만, 그녀의 일렁이는 눈빛이 그녀가 마냥 어리숙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이름이 마리에트라고 했던가.저번 주쯤, 벨리르의 작은 살롱에서 전시회를 열었다고 했었지.그 작은 여자가 무언가 불만이 있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오셨죠? 이 좁은 길을 마차까지 타고 오시다니, 발걸음이 마냥 쉽지는 않으셨겠어요."

이건 또 새로운데.보통의 사람들은 나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화법으로 보아하니 아예 예법에 무지한 것 같지는 않은데, 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하지만 참아주도록 할까. 너른 아량으로.라일은 마리에트의 무례한 태도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미소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여기가 마리에트 씨가 운영하는 아틀리에, 맞습니까?"

그녀는 조금 누그러진 듯한 말투로 되물었다.

"... 네, 맞는데요. 작품 보러 오셨어요?"

"지인이 이곳에서 샀다며 그림을 한 점 선물했는데, 썩 마음에 드는 그림이기에. 직접 다른 작품들도 살펴볼 수 있을까 싶어 찾아왔는데... 불편하셨습니까?"

그제야 마리에트는 경계심이 좀 누그러진 건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라일을 안으로 들였다.

"그림을 선물 받으셨다고 하셨죠? 요근래에 팔린 그림은 하나 뿐인데..."

"예, 벨리르 강의 풍경과 백조가 그려진 그림이었습니다."

여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얼핏 듣기로는 그 재수탱이가 사간 그림이구만. 이라고 중얼거린 거 같았다.재수탱이라... 라카드 백작과 그 사용인들이 다소 안하무인이고 예의가 모자란 경향이 있기는 하지. 라일은 속으로 작게나마 공감을 표하며 아틀리에 안으로 발을 들였다.

"뭐, 그림이 마음에 드셨다면 다행이네요. 꽤나 소박한 그림이라... 귀족분들의 고급스러운 취향과는 거리가 좀 있을 텐데 말이죠."

뭐랄까. 참 흥미로운 여자였다.옷차림부터 말본새까지. 모든 게 라일 리브리에가 살아온 환경과는 정반대에 서 있는 듯한 인간상이었다.

"뭐... 편하게 둘러보세요. 보시다시피, 꼴이 이래서 둘러보기 좀 힘드시겠지만요. 꺼내기 힘드시면 말씀하시구요. 저는 할 일이 좀 있어서..."

급기야 그녀는 손님으로 온 라일을 내팽개치고는 할 일이 있다며 작업대로 달려가 버렸다.살면서 처음 받아보는 푸대접에 머리가 얼얼했지만 딱히 무례한 저 여인과 대화를 길게 나누고 싶은 마음도 없었겠다, 마음 편히 아틀리에 내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주방으로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벽난로 옆의 공간에는 마을에서 유명한 빵집에서 사 온 듯한 바게트 하나가 덩그러니 내팽개쳐져 있었고, 그 위의 선반에는 손수 만든 듯한 과일잼들이 줄지어 놓여있었다.한쪽 벽면에는 직접 따서 말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꽃다발들이 몇 개 걸려있었다.그림들은 정말 사방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고, 캔버스 구석이 찍혀있는 경우도 있었다.

'... 그림을 팔 생각이 별로 없어 보이는데.'

하지만 그 엉망진창인 아틀리에의 모습과는 대조되는 섬세하고 따스한 색채의 그림들이 시선을 잡아끌었다.평민처럼 보이는 여자가, 어떻게 이런 섬세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냈을까. 물론 자세히 살펴보면 투박한 구석이 있기도 했다. 제대로 그림을 배우지 않은 것인지, 정형화된 양식과도 동떨어져 있었다. 그러니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녀의 그림은 가치가 없는 것에 가까웠다. 투박하고, 형식적이지 않기에.하지만 라일은 그 점이 싫지 않았다.자신과 자신의 부친이 한평생을 바쳐 꾸려온 영지의 모습을 그림으로 보고 있을 뿐인데, 새삼스럽게 그리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시골 마을 구석에서 작디작은 여인이 그려낸 그림에 마음이 동하다니. 병상에 누운 아버지도 놀라 벌떡 일어날 이야기였다.

"이 그림, 얼마입니까?"

라일은 창가에 놓인 이젤 위의 그림을 가리켰다. 이젤 위를 손가락으로 한 번 쓸자, 뽀얗게 내려앉았던 먼지들이 두둥실 떠올라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푸른 하늘을 날고 있는 철새 떼를 그린 그림이었다. 소박하다 못해 텅 비어 보이기까지 했지만, 묘하게 시선이 갔다.무언가를 유발에 넣고 곱게 갈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어 라일을 바라보곤 민망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 팔려고 그린 그림은 아닌데, 3실링만 주세요. 그 정도면 재룟값은 나오겠죠."

3실링이라니, 이 여자는 정말로 팔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닌 듯했다.수도의 살롱에서는 무명 화가가 그린 그림도 최소 10실링은 받는데.

"... 3실링이라."

라일이 흐음 소리를 내며 고민하는 시늉을 하자, 마리에트가 미간을 구기며 빈정거렸다. 짜증이 잔뜩 묻어있는 말투였다.

"가격이 마음에 안 드시면 어쩔 수 없구요. 저도 안 팔면 그만이라서."

아무래도 터무니없이 싼 값에 놀라서 신음하고 있던 제 모습을 곡해해서 받아들인 듯했다.라일은 스스로가 예술품으로 흥정이나 하는 무뢰배처럼 보이는지 잠시 고민했다.

"아,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생각한 것에 비해 너무 낮은 가격을 부르시기에."

라일은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5파운드짜리 지폐였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에선 사용하기 힘들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라일이 생각하는 이 그림의 가치는 마땅히 이 정도였다. 마리에트는 또 한 번 미간을 구겼다.

"... 이렇게 큰돈은 못 받아요. 이런 시골 마을에서 젊은 처녀가 이만한 돈을 가지고 있다는 게 소문이라도 났다간, 전 아마 다음날에 차가운 시체가 돼서 발견될 거예요. 무엇보다, 그 정도로 대단한 그림도 아닌걸요."

... 벨리르의 치안이 그 정도로 엉망이던가. 경비대원을 더 뽑아야겠군.잠시 제 영지의 치안 상황을 점검해 볼 필요성을 느낀 라일이 피식 웃고는 마리에트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그리고선 듣기 좋은, 어쩌면 관능적으로까지 들리는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라일 리브리에는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띠며 차갑게 내려앉은 밤안개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이 그림과, 제가 의뢰할 그림 한 장의 값으로 치는 겁니다. 작품 두 점에 5파운드 정도면 과한 가격은 아닐 테지요."

라일 제 스스로도 의아할 정도로 충동적인 제안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그저 돈을 내려놓고 그림을 챙겨 돌아갔을 텐데, 저 산토끼 같은 여자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바보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걸까.머릿속이 시끄러워졌다.






3화: 사향



"의뢰요?"

마리에트가 미덥지 않다는 듯한 얼굴로 되물어왔다. 하기야, 예술가에게 그림을 의뢰한다거나 후원한다는 명목으로 접근해서 몹쓸 짓을 하는 귀족들에 대한 이야기는 늘 있었으니까. 걱정되기도 하겠지. 이해가 가는 반응이었다.

"예, 제 초상화를 그려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초상화를 그려본 적이 없는걸요."

마리에트는 손사래를 치며 뒤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사정이 좀 있어서, 귀족과 엮이는 일은 사양하고 싶어요."

대체 무슨 사정이기에 알티에라 제국에서 예술을 하면서 귀족과 엮이고 싶지 않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걸까.황실부터 지방 귀족들까지 모두가 예술을 사랑하고 후원하는 나라에서, 귀족과 엮이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던가.

"귀족과 엮이기 싫다라..."

라일이 소리를 내지 않는 부드러운 걸음걸이로 마리에트에게 좀 더 바짝 다가갔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마리에트는 사내에게서 훅 끼쳐오는 짙은 머스크 향에 흠칫하며 뒷걸음질 쳤다.방금까진 별생각 없었는데, 갑자기 느껴진 향 때문일까. 이 좁아터진 오두막에 낯선 남자와 단둘이 있다는 사실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 죄송하지만, '신사'분께 대접할 차와 디저트가 마땅치 않네요. 긴 얘기는 나중에 하는 편이 좋겠어요."

마리에트는 묘하게 '신사'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발음했다.라일은 피식 웃었다. 신사답게 더 캐묻지 말고, 썩 꺼지라는 뜻이겠지. 그저 왈가닥 평민이라고 생각했는데, 답지 않게 귀족 영애같은 화법을 구사하기도 하는군.라일은 찬장 쪽을 바라봤다. 차가 마땅치 않다니, 곱게 포장되어 줄지어 늘어서 있는 저 찻잎들은 다 뭐란 말인가. 꽤나 고급스러운 차를 즐기는 취미가 있어 보이는데.라일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신사'답게 예법에 맞춰 인사를 건넸다.

"제가 드린 제안은 유효합니다. 또 찾아오지요."

라일은 지폐를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그림을 챙겨 문밖을 나섰다.그림을 사용인에게 건네주고 마차에 올라타서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이 짧았다. 이유 모를 호기심이 자꾸 고개를 내밀었다. 내가 가꿔놓은 정원에 뛰어 들어온 작은 산토끼 같은 그 여자가 신경쓰였다.왠지 오늘은 잠이 쉬이 오지 않을 듯했다. 다리를 건너 길게 나 있는 벽돌길을 지나며 바라본 강가의 그 아틀리에가 온종일 눈앞에 아른거릴 것 같았다.

*

벨리르의 아침은 너무 빨리 찾아왔다. 밤새 코끝에 맴도는 머스크 향과, 이리저리 얽혀 시작점을 찾을 수 없는 생각들에 머리가 아파 깊이 잠들지 못한 탓이었다.마리에트는 푸석해진 머리를 대충 올려묶고, 작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려 세수했다. 적당히 찬기가 도는 물이 살갗에 닿아오자 그제야 정신이 좀 돌아오는 듯했다.마리에트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애써 무시하고 있던 어머니의 편지를 꺼내 들었다. 고급스러운 재질의 편지봉투와 찍혀있는 실링 왁스를 보고 있자니, 괜스레 짜증이 올라왔다.

'이런 사치를 부릴 돈은 아직 남아있나 보지?'

편지 내용은 평소와 같았다. 짤막한 남동생의 근황, 영지의 재정 상태에 대한 푸념, 언제까지 방황할 거냐는 잔소리... 내가 미쳤다고 이런 영양가 없는 편지를 열어봐서, 괜히 기분만 버렸지.마리에트는 편지를 한숨과 함께 대충 던져 놓았다. 짜증이 났다.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엔 숲에서 과일을 따다 잼을 만들거나, 꽃을 따다 말려야 되는데. 그럴 기분조차 나지 않았다.그렇게 멍하니 앉아 어제 미처 완성하지 못한 물감을 만들고 있던 차에, 또다시 누군가 작은 오두막의 문을 두드렸다.

'... 오늘은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하지만 어쩌겠는가. 한 점이라도 팔아야지. 마리에트는 헐렁하게 풀어진 머리를 다시 한번 질끈 묶고 문을 열었다.

"네~ 나갑니다."

끼이익, 익숙한 소리와 함께 열린 문 앞엔 익숙한 인물이 서 있었다.

"마리, 무슨 일이라도 있어? 얼굴이 아주 죽상이다. 얘."

일전의 전시회를 추천했던 서점 주인, 알리야였다. 그녀는 마리에트보다 5살 정도 많았는데, 언제나 마리에트를 살뜰히 챙겨주는 고마운 지인이었다.오늘도 스튜를 끓였는데 온 가족이 먹고도 남을 정도라며 굳이 내 몫을 챙겨 이 외진 숲까지 찾아와준 것이다. 그녀의 다정함 덕분에 괜스레 울적했던 마음이 좀 풀어지는 듯했다.

"그냥... 그림이 팔렸는데 고민이 좀 생겨서요."

"어머, 그림이 팔렸는데 고민일 건 또 뭐가 있어? 혹시 사러 온 손님이 너무 잘생겨서 반해버리기라도 했니?"

마리에트는 괜히 얼굴을 붉히며 발끈했다. 고민 중인 내용은 그게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알리야! 그런 건 아니에요. 그저... 그 손님이 작품에 비해 너무 과분한 돈을 지불했거든요."

"그게 뭐가 문제야? 남들은 못 벌어서 안달인 돈을."

"사실 처음엔 너무 큰 돈이라 거절했는데... 그 손님이 그럼 자기 의뢰 하나를 더 받아주면 되지 않겠냐며 돈을 그냥 두고 가버렸어요. 근데..."

마리에트는 말을 아꼈다. 마리에트는 알리야를 믿지만, 그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자신은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속였다며 화를 낼까 봐 두려웠다.알리야는 마리에트가 대체 뭘 고민하고 있는 건지 도통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그럼 의뢰를 받으면 되지. 마리, 너 가끔 참 이상하다? 그림을 그릴 땐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변하는데, 막상 자기 그림에 대한 자신은 또 없고... 얘, 배울 만큼 배운 귀족이 그만한 돈을 지불했다는 건, 네 그림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야."

"그야... 저는 제대로 배워서 그리는 것도 아니고, 그저 손이 가는 대로 그렸을 뿐이니까요."

"그게 흠이니? 마리, 자신을 가져. 오히려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너만의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거야."

알리야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언젠가는 수도의 모든 살롱에서 너의 그림이 전시되는 날이 올 거라고. 모든 신문에 네 그림이 실리고, 제국의 모든 이가 네 이름을 알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

"정말 그런 날이 올까요?"

"내가 틀린 말 하는 거 봤니? 걱정하지 말고, 스튜나 먹고 좀 쉬어. 너 얼굴이 말이 아니다."

알리야는 마리에트의 등을 몇 번 두들겨주고는 짐을 챙겨 오두막을 나섰다. 가게를 잠시 비우고 온 거라 오래 있을 수 없어 미안하다며, 몇번이나 밥 좀 챙겨 먹으라는 잔소리를 남겼다. 마리에트는 그 잔소리가 퍽 달가웠다. 사실은 홀로 살아가는 일이 꽤 버거웠을지도 모르겠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마리에트는 멍하니 앉아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밤새 자신을 괴롭히던 그 복잡한 생각들을 부러 끄집어내는 일은 꽤 괴로웠지만, 지금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아버지가 진 노름빚으로 휘청이던 가문, 혼기가 찬 나를 마치 무역품처럼 부유한 가문에게 팔아넘기려던 그 순간 번뜩이던 아버지의 눈동자, 계집이 무슨 그림이냐며 윽박지르던 어머니의 찢어지는 목소리.도망치듯 저택을 박차고 나와 헤매던 나날. 결국 내 위치는 어머니에게 들켜버렸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나를 직접 찾아온 적은 없었다. 지금의 나는 가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내가 귀족들과 엮이기 시작한다면?그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눈에 불을 켜고 나를 찾아다니겠지. 사교계에 줄을 댈 수단으로써 나를 이용하기 위해서.

'의뢰는 거절하고, 돈은 돌려주자.'

내 작품이 널리 알려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자유였다.돈이 없는 건 견딜 만했다. 하지만 원하지 않는 상대에게 팔려 가듯 혼인하는 것만큼은 죽을 만큼 싫었다. 내가 살아갈 곳조차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는 인생이라니. 죄인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마리에트는 조용히 스푼을 들었다. 하루 종일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소음이 멎어들자, 그제야 입맛이 돌았다. 알리야가 가져다준 스튜는 맛있었다.다만 한 가지,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이 있었다.온종일 코끝을 간지럽히는 이 머스크 향은 도무지 사라지지를 않았다.

*

길고 유려한 손가락이 건반을 치듯이 책상 위로 내려앉았다. 리브리에의 주인, 라일 리브리에는 생각에 잠겨있었다.온종일 그 조그마한 오두막과, 헤이즐 색 곱슬머리를 가진 그 여자의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왜?수차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았지만, 마땅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저 그림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일까? 그럴 리가. 그럼, 그녀의 외모가 마음에 들었나? 뭐, 못난 외모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경국지색의 미모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성격? 최악이지.모두 아니라면, 설마...? 라일은 갑자기 떠오른 그녀의 훤히 드러난 팔과 다리를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 어처구니가 없군.'

도통 느껴본 적이 없는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혀서 일조차 제대로 하질 못했다. 아파서 죽을 것만 같던 때에도 업무만큼은 소화해 내던 그 라일 리브리에가.라일은 신경질적으로 손가락을 꺾어 뚜둑 소리를 내며 집무실 탁상 맞은 편에 걸려있는 그림 두 점을 바라봤다.벨리르 강의 백조, 그리고 하늘을 나는 철새들.라일은 결국 펜을 내려놓고 탁상 구석에 놓여있던 종을 울려 집사를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어제 방문했던 그 아틀리에, 그곳의 주인에 대해서 알아 와. 하나도 빠짐없이."

이 불쾌한 기분을 떨쳐낼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이 기분을 느끼게 한 원흉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내는 것.그 여자가 대체 어디서 왔고,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면 내가 느끼는 이 더러운 감정이 무엇인지도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







4화: 새장을 벗어난 새



마리에트 로지에. 리브리에령 인근에 있는 작은 영지를 다스리는 로지에 백작가의 첫째 딸. 일 년 정도 전부터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큰 병에 걸려 병상에 누워있다는 소문이 있다라...라일은 집사가 조사해 온 마리에트에 대한 서류를 읽다 말고 내려놓았다.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병에 걸려? 그 여자가? 우습지도 않군.'

라일은 자신의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제 할 말을 다 하던 여인을 떠올렸다. 큰 병에 걸렸다는 로지에 영애가 어떻게 리브리에령의 벨리르에서 아틀리에를 운영하고 있다는 말인가.가능성이 없는 가설은 아니었겠지. 그녀가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시기쯤부터 로지에 가문의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갔다는 건, 사교계와 거리를 두고 있는 라일조차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얘기였으니까. 하지만 그 실상은 달랐다. 로지에 가문의 재정 악화는 가주, 그러니까 마리에트의 부친인 '가브리엘 로지에'의 도박 중독 때문이었으니까.

"... 귀족 출신이었나."

그건 그것대로 놀랄 일이었다.아무리 몰락해 가는 한미한 가문의 영애라지만, 적당한 혼처를 찾았으면 지금보단 훨씬 편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왜 가문을 떠나 작은 시골 마을에서 그림이나 그리고 있는 걸까.그리고 무엇보다... 장성한 귀족 영애가, 맨살을 훤히 드러내고 다닌다니. 라일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어려서부터 그는 귀족은 함부로 맨살을 드러내선 안 된다는 교육을 받아왔고, 철저히 지켜왔다. 그 탓에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여름에도 셔츠의 단추를 목 끝까지 잠그고 다닐 정도였으니까.

"알면 알 수록 이해할 수 없는 여자로군."

라일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아무래도 이런 종이 쪼가리로 알아내기엔 너무 복잡한 여자 같으니, 직접 마주 보고 관찰해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

마리에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의뢰를 거절하기로 마음을 먹기는 했는데, 도통 그 손님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가 누군지도 모르는걸.

"... 결국 그 손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마리에트는 5파운드짜리 지폐를 서랍장 안에 고이 넣어두었다. 꼭 돌려줘야지.그녀는 머리를 고쳐 묶고 이젤에 걸쳐져 있는 캔버스로 시선을 돌렸다. 담장 위로 흐드러지게 피어난 능소화가 그려져 있었다.여름이 지나기 전에 꼭 그려보고 싶은 풍경이었다. 필립의 화방 옆 담장을 타고 자라난 능소화가 굉장히 사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그녀에게 그림은 곧 일기 같은 것이었다. 잊고 싶지 않은 찰나의 풍경을 담아내는 것, 그게 마리에트의 예술이었고 언어였다.마리에트는 캔버스 위로 글을 써 내려갔다. 능소화를 보던 그 순간 느낀 감정과 그날의 공기를 떠올리며 붓을 움직였다. 그렇게 한참을 몰두하고 있던 순간, 다리 너머에서 마차 바퀴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람일까?'

마리에트는 괜히 앞치마를 고쳐 맸다.조개 물감 때문에 흥분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무례하게 굴었던 첫 만남이 내내 신경 쓰였다.발소리가 들려왔다. 한 발짝, 두 발짝... 그리고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빨리 문을 열지는 말자. 하나, 둘. 심호흡하고... 문을 열었다.

"... 아, 어떻게 오셨어요?"

문 앞에 서 있는 건 기대하던...

'아니, 기대하다니? 그냥 조금 기다렸을 뿐이야. 돈을 돌려줘야 하니까. '

어쨌든, 상상했던 인물은 아니었다. 옹졸하게 자라난 수염이 퍽 우스꽝스러운 중년 남성이었다. 팔다리에 비해 풍만한 복부가 인상적이었다. 마차까지 대동해서 온 걸로 보아하니 이 사람도 귀족인 걸까?귀족과 엮이지 말자고 다짐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또 귀족 손님이라니. 전시회의 효과가 너무 대단한 것 같았다.

"아, 여기가 소문의 그 아틀리에로군. 생각보다는... 꽤 아담하지만."

배불뚝이 남성은 기름을 칠한 듯한 인위적인 억양으로 얘기했다. 남자는 안으로 들어오라 청하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오두막 안으로 침범해 왔다.남자는 그 몇 발짝을 걷는 것도 버거운지, 장대비 같은 땀을 흘려댔다. 그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며 이리저리 오두막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작품들은 어디에 있지?"

'...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재수 없는 뚱땡이가.'

마리에트는 남자의 무례함에 이를 갈면서도, 귀족들이 다 그렇지라며 마음을 다스렸다.

"... 특별히 찾으시는 작품이라도 있으신가요?"

"그저 리브리에 후작이 방문했다는 소문이 있어서 들러봤을 뿐, 계집이 그린 그림 따위에 흥미가 있어서 온 것은 아니니 알아서 대령해보거라."

내가 지금 뭘 잘못 들었나? 마리에트는 와락 미간을 구겼다. 계집이 그린 그림 따위?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브리에 후작이 어쩌구 하는 얘기도 한 것 같았는데, 지금 마리에트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가세요."

"뭐, 뭐라고?"

"제가 어렵게 말씀드렸나요? 나가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미천한 평민 계집이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사용인을 대신 보낸 것도 아니고 뒤에 수행원이 따라다니는 것도 아닌 걸로 보아하니, 그다지 높은 신분은 아닌 거 같은데.끽해야 어디 시골 영지에서나 떵떵거리는 남작이나 될까 싶었다. 뻔하지. 귀족 사회에서 못 받은 대접을 만만한 평민에게 받고 싶어 하는 패배자일 뿐이다.

"글쎄요. 품위도 기사도도 없으시니... 제가 보기엔 무뢰배나 다름이 없으신데."

남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분하겠지. 새파랗게 어린 평민 계집에게 모욕당하리라곤 생각도 못 했을 테니까.그는 벌게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마리에트에게 다가왔다.

'얼굴 봐라, 한 대 치겠구만.'

맞는 것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세상 물정 모르던 귀족 영애가 세상 밖으로 나와서 겪은 수모가 한둘이겠는가.마리에트가 뺨 한 대쯤을 각오한 듯 두 눈을 질끈 감으려던 그때, 구둣발이 나무 바닥과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객이 계셨군요."

그윽하게 퍼지는 머스크 향과 짙게 가라앉은 목소리. 마치 벨리르 강의 어둠이 사람이 된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 일전의 그 손님이었다.

"너무 이른 시간에 레이디 혼자 있는 집을 찾는 건 실례일까 싶어, 부러 조금 여유롭게 온 것인데... 타이밍이 좋지 않았군요."

"리, 리브리에 후작...?!"

중년의 남자가 사내를 보곤 기겁하듯 외쳤다. 리브리에 후작이라고? 저 사람이?

'리브리에 후작이라면... 이곳의 영주잖아? 아들이 작위를 물려받았다고 듣긴 했었는데, 저 사람이었다고?'

생각보다 훨씬 거물이었잖아?

"고급스러운 향수 냄새가 나는 걸 보니, 귀족이신가 보군요. 다만, 그런 것치고는..."

리브리에 후작이라고 불린 이가 군더더기 없는 걸음걸이로 남자에게 다가섰다. 위협의 의도는 없는 듯했지만, 그가 풍기는 위압감만으로도 남자는 겁에 질린 듯했다.

"매너가 엉망이로군요. 레이디를 위협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감히 저와 제 가문을 함부로 입에 담다니."

"그... 그것이... 제,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남자는 꼬리를 말고 쩔쩔매며 연신 사과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마리에트의 입안이 썼다.

"제가 봐드리는 건 이번 한 번뿐일 겁니다. 조용히 떠나십시오."

리브리에 후작이 남자의 어깨를 가볍게 털며 낮은 목소리로 축객령을 내렸다. 언제부터 보고 있던 거지? 순전히 타이밍 좋게 나타난 걸까?남자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황급히 오두막을 떠났다. 집주인인 내가 나가랄 때는 듣지도 않고 바락바락 화를 내더니, 이제야 꽁무니를 빼는 꼴에 환멸감이 치밀어올랐다.

"... 언제부터 듣고 계셨어요?"

리브리에 후작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마침 제가 도착했을 땐 저 치가 그대에게 해를 가할 것처럼 다가서고 있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끼어들었을 뿐입니다만. 하실 말씀은 그게 다입니까?"

"... 감사해요. 곤란하던 참이었는데."

마리에트가 쭈뼛거리며 사과를 건네자, 리브리에 후작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별말씀을."

그는 마리에트가 작업 중이던 그림을 보곤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작업 중이셨나 보군요. 제 제안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 그건... 죄송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리브리에 후작의 눈동자에 묘한 이채가 돌았다.그는 마치 다 예상했다는 듯, 사과할 필요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괜찮습니다. 영애도 나름의 사정이 있으시겠지요."

영애라고 한 건가? 지금? 나한테?마리에트의 뒷목에서 한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리브리에 후작은 시종일관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 착각하셨나보군요. 영애라니요. 호칭이 과하십니다."

"... 예, 제가 잠시 실수를 했습니다. 사과드리지요. 의뢰는 거절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돈은 돌려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작품값으로 지불한 것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후작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평온했다.마치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눈빛. ...실수가 아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출신을 알고 있다. 마리에트는 덜컥 겁이 났다. 귀족과 엮이지 않겠다던 다짐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집 안을 가득 채운 짙은 향수 냄새에 숨이 막혀왔다.







5화: 나비 표본



마리에트는 애써 웃음 지었다. 침착하자, 마리. 정말 실수일 수도 있잖아.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끝이 저렸지만, 그녀는 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 네, 뭐..."

라일은 그런 마리에트를 보며 묘한 쾌감을 느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변수처럼 느껴지던 그녀가, 자신의 말 한마디에 지레 겁을 먹고 불안해하는 모습이라니. 꽤 짜릿한 광경이었다.라일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마리에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한 발짝, 두 발짝.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동공이 눈에 띄게 흔들리는 모습이 퍽 우스웠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둘까.

"안색이 썩 좋지 않으시군요. 몸이 좋지 않으신 듯한데,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요."

라일이 발을 돌려 오두막을 떠나자, 마리에트는 그제야 달뜬 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렇게까지 겁먹을 건 없었잖아. 그녀는 땀으로 젖어 축축해진 손을 닦아냈다.애써 붓을 잡았지만, 손이 떨려와 선 하나 제대로 긋지 못했다. 짙고 무거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 영애.

그 단어 뒤에 따라붙던 수많은 희롱의 말들. 보호는커녕 자신을 그 이리들에게 팔아넘길 생각만 하던 무능한 부모. 온 힘을 다해 저항하는 자신에게 쏟아지던 폭언들.더 이상 그런 것들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그 남자가 자신에 대한 걸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돈만 주면 뭐든지 해주는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니까. 중요한 건, 그가 왜 자신에 대한 걸 알고 싶어 했는지였다.

'그날 내가 무례하게 굴어서 그런 걸까?'

역시 조심해야 했다. 아니, 하다못해 흔한 이름이라고 방심하지 말고 가명이라도 쓸 걸 그랬나?의미 없는 생각들이었다. 제국 최고의 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리브리에 후작인데, 내 신상을 알아내는 것 따위는 일도 아닐 테지.뱃속이 시끄러웠다. 마리에트는 직감했다. 오늘도 밤은 길고 달빛은 흐리겠구나.

*

햇빛은 누그러들고,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는 늦은 오후. 리브리에 저택의 정원은 늘 그렇듯 완벽했다.가지런히 손질된 장미 울타리와 향을 맡고 날아든 색색의 나비들. 인공 호수 속을 헤엄치는 아름다운 물고기들. 최고급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돔.그 완벽한 풍경을 눈에 담고 있던 귀부인이 제 생을 모두 바쳐 완벽하게 키워낸 걸작품을 향해 말을 건넸다.

"데레스테 영애와는 좀 어떠니."

그녀의 아들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이젠 정말 혼기가 다 찼으니 어서 혼인하고 후사를 봐야 할 텐데. 요즘 들어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제 약혼자에겐 소홀하고 다른 생각에 빠져있는 듯한 아들이 염려스러웠다.

"라일, 혼인은 단순한 개인의 일이 아니라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니?"

"제가 언제 일을 그르치는 걸 본 적 있으십니까."

"그래. 너는 우리를 실망시킨 적이 없지. 하지만 라일, 너희 아버지께서 네 후사에 대해 이야기하실 때마다 이 어미의 마음은 끝없이 무거워지는구나."

귀부인, 카밀라 리브리에는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제 아들에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앞으로도 쭉, 네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라일."

라일은 목 끝까지 잠가놓은 단추가 답답한 듯, 옷매무새를 고치며 태연히 대꾸했다.

"예. 조만간 영애와 만나보도록 하지요."

오늘따라 장미 향이 거슬렸다. 정원을 싹 다 밀어버리고 다른 꽃으로 바꿔야 하나.라일은 장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꽃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크게 중요하지 않은 사실이지만.

"요즘 외출이 잦다 들었다. 영지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니?"

"어머니께서 염려하실 바는 아닙니다. 이제 슬슬 들어가시지요. 바람이 차가워지는군요."

라일은 교묘하게 대답을 피하며 제 모친의 어깨에 걸쳐있는 숄을 정돈해 주었다.카밀라는 태연하게 말을 돌리는 제 아들을 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어릴 때는 좋고 싫음 없이 말만 잘 듣더니, 나이가 들수록 제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드는 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요즘 뭘 하고 다니는 건지 좀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라일은 카밀라를 방문 앞까지 에스코트한 후에야 집무실로 돌아왔다. 한 구석에 놓여있는 괘종시계가 울리며 시간을 알렸다.집무실은 눈의 피로를 덜기 위해 채도가 낮고 어두운 톤의 가구들로 꾸며져 있었다. 라일은 창가로 다가갔다. 얼마 전에 메이드를 새로 뽑았다더니, 청소가 미흡했는지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 쯧.'

라일은 손으로 창가를 슥 쓸어냈다. 떠오른 먼지들이 노을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자연스럽게 그녀와 그 작은 오두막이 떠올랐다. 두둥실 떠올라 별 가루처럼 반짝이던 먼지들, 좁은 집 안을 가득 채운 말린 꽃향기.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있는 여인, 마리에트 로지에.라일은 미간을 구겼다. 분명 그 여자에 대해 이제는 알 만큼 알게 된 거 같은데, 왜 아직도 이런 불쾌한 감정이 드는 거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나?그는 탁상 구석의 종을 들어 울려 집사를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오늘 여길 청소한 메이드, 해고하도록."

집사는 별다른 질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에겐 모든 게 이렇게 간단한 일이었다. 사람을 다루는 것도, 감정을 통제하는 일도. 분명 그래야 했다. 그런데 며칠 내내 자신을 괴롭히는 이 기묘한 감정은 대체 무엇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통제는커녕 파악조차 되지 않았다.

"... 마리에트. 마리에트 로지에."

그는 입안으로 그녀의 이름을 곱씹어 불렀다. 혀끝이 간질간질했다. 그 감각이 퍽 불편했다.물론 흥미로운 여자였다. 귀족으로서의 모든 걸 버려두고 시골 마을로 내려와 홀로 예술을 하는 백작 영애. 이 얼마나 흥미로운 단어 조합이란 말인가.그뿐이랴, 거구의 사내에게도 겁먹지 않고 따박따박 대드는 그 성질머리는 또 어떻고? 자신의 상식과 동떨어져 있는 그녀의 모든 것이 흥미로웠고, 궁금했다.라일은 집무용 책상 맞은편 벽에 장식되어 있는 나비 표본을 바라봤다. 몇 년 전에 휴가차 방문했던 남국의 섬에서 처음 본 나비였는데, 그 색이 아름답고 오묘하기에 어렵게 수소문해 구해온 표본이었다. 그 옆에는 마리에트의 아틀리에에서 구매해 온 두 점의 그림이 걸려있었다.그는 무언가 번뜩 떠오른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 끔찍하고 낯선 기분을 어떻게 해야 지워낼 수 있을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그는 다시 종을 들었다.

*

"네? 필립이 다쳤다니요? 어쩌다가요?"

"글쎄, 물건을 떼러 가다가 마차에 치였다는 거 같아. 그래서 한동안 장사를 못 한다는데..."

필립의 화방 옆에서 과일 장사를 하는 엠마 아주머니가 안됐다는 표정으로 비보를 전했다.마리에트는 막막했다. 그럼 나는 어디서 재료를 구하지?그리고 무엇보다 필립은 괜찮은지 걱정됐다. 마차에 치이다니, 크게 다친 걸까?병문안이 가고 싶었지만, 필립의 남동생이 한사코 거절하는 통에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 큰일이네요. 물감이 다 떨어졌는데..."

이 작은 시골 마을에서 물감이나 안료를 파는 곳이 있을 리가 있나. 난처한 상황이었다. 리브리에 후작가 영내 근처의 번화가까지는 나가야 물감을 구할 수 있을텐데.

'... 별일이야 있겠어? 후작이 한가한 것도 아니고, 설마 그 넓은 번화가에서 마주치진 않겠지.'

마리에트는 번화가로 가는 마차에 올라탔다. 마음 같아서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물감이 똑 떨어진 타이밍에 필립까지 다쳐버리다니. 운명의 장난인가 싶었다.덜커덩, 덜커덩. 탑승감이 썩 좋지는 않은 마차를 타고 얼마나 달렸을까? 해가 쨍쨍할 때 마차를 탄 거 같은데,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노을이 지고 있었다.

"2실링만 주시오."

수염이 길게 자란 마부가 껄렁거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2실링이라니, 이게 무슨 바가지야?

"네? 2실링이라뇨, 저번에 왔을 땐 9펜스였어요."

"허허,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로구만. 글쎄 물가가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데, 우리도 2실링 정도는 받아야 말한테 먹일 건초 값이라도 벌지 않겠어?"

쉬이 납득이 가지 않는 금액이었지만, 구려 터진 탑승감 탓에 입씨름할 기운조차 없어진 마리에트는 결국 주머니에서 2실링 동전을 꺼내 건넸다.

"고맙네, 아가씨."

마부는 얄밉게 인사하며 마차를 돌려 떠났다. 마리에트는 저 멀리 멀어지는 마차를 향해 작은 조약돌을 걷어차며 툴툴거렸다.

"아무리 물가가 올랐어도 그렇지, 2실링이라니. 말도 안 돼, 정말."

마리에트는 혀를 내두르며 주위를 둘러봤다. 같은 후작령이라지만, 후작가의 저택과 가까운 곳에 있는 번화가는 뭔가 달라도 달랐다. 새하얀 돌로 정리된 길 위에는 가로등이 늘어서 있고, 광장 한복판에는 유려한 조각으로 장식된 분수대가 자리 잡고 있었다.리브리에 후작가가 제국에서 가장 돈이 많은 가문이라더니,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아, 내 정신 좀 봐."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이 없었다. 가게들이 문을 닫기 전에 어서 재료를 구매해야 했다. 마리에트는 주위를 살폈다. 미술 상점이라고는 필립의 화방 하나뿐이던 마을과 달리, 이곳은 고급스러운 간판이 달린 미술 상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마리에트는 그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간판이 달린 가게를 찾아 발길을 옮겼다.방금까지의 찝찝한 기분은 이미 잊히고, 새롭고 희귀한 재료들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있었다.멋진 시간이 될 것만 같았다.







6화: 가십



길고 올곧은 손가락이 토독 소리를 내며 책상 위를 두드린다. 앞에서 무어라 보고를 올리던 집사가 흠칫거린다.

"... 지시하신대로 처리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지켜보라 하셨던 여자는 지금 영내 광장에 와있다고 합니다."

"잡음 나오지 않게 잘 처리하도록. 아니면 뭐... 영내에 가게라도 하나 차려주든지. 어찌 됐든 영애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도록 해."

집사가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대답하고는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라일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자신이 짜놓은 판 위에서 생각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을 볼 때 느껴지는 이 쾌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던 라일이 별안간 미간을 구겼다.

'... 그토록 혐오하는 아버지와 별다를 것도 없는 짓을 하고 있군.'

하지만 어쩌겠는가. 평생을 보고 배운 것이 이런 것뿐인데. 짜증이 솟구친 라일이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

마리에트는 기분이 좋았다. 평소엔 써보지 못했던 희귀한 물감들도 잔뜩 구했고, 작지만 질이 좋은 대리석도 구매했다.

'아직 대리석 조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나무와는 느낌이 많이 다르겠지? 기대된다.'

너무 신나게 물건을 골라 담은 탓에 혼자 들고 갈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짐꾼을 고용해야 했지만, 그 정도 지출은 감당할 만했다.마을에 도착하자 하늘은 어느새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짐을 오두막에 들여놓은 마리에트는 밤 산책을 나섰다. 그녀는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벨리르 강의 윤슬을 보는 일을 좋아했다.태양도 잠이 든 깊은 밤, 은은하게 내려앉은 달빛에 응답하듯 반짝이는 강물. 고요한 적막을 흔드는 작은 풀벌레 소리. 마리에트는 그 평온한 풍경 속을 거닐며 하루를 되짚어 봤다.

'필립은 괜찮을까? 많이 다친 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어서 대리석 조각을 연습해서 필립한테 보여주고 싶다.'

그녀는 벨리르 강을 향해 눈을 감고 기도했다.

'내가 사랑하는 모두가 평안하기를.'

*

"네? 물건이 안 들어왔다니요?"

"말 그대로예요. 얼마 전에 불법으로 무기를 밀수하던 업자들이 잡히는 바람에 무역품 검수가 빡빡해졌거든요."

영내의 미술 상점 사장이 난처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육로보다 수로가 발달한 리브리에 후작령 특성상 수입산 재료가 더 많이 들어오기 마련인데, 얼마 전에 터진 밀수 사건 탓에 통관 과정이 복잡해져 물건 수급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였다.

"어쨌든, 지금은 어느 가게든 똑같을 거예요."

가게를 빠져나온 마리에트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따라 일이 자꾸 꼬이는 것만 같았다. 필립이 다치질 않나, 몇 시간을 달려서 영내까지 나왔는데 이젠 여기서도 재료를 구할 수 없다니. 한숨을 몇 번이나 내뱉어도 답답한 심정이 쉬이 풀리질 않았다.마리에트는 결국 빈손으로 마차에 올라탔다. 집으로 가는 길이 아까보다 몇 배는 멀게 느껴졌다.

*

사치스럽게 꾸며진 수도의 한 살롱. 그곳에 방문한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사교계와 담을 쌓고 지내기로 유명한 리브리에가의 젊은 후작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서로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호기심과 경악이 담겨 오갔다. 제국 최고의 재력을 가진 리브리에 가문의 주인이자 벨리르 강이 키워낸 최고의 귀족이라는, 화려하지만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의 실체를 목격하게 된다니. 사교계에서 몇 주간은 이야깃거리가 끊기지 않을 것 같았다.

"리브리에 후작께서 여기까지 발걸음하시다니요. 실로 놀라운 광경이군요."

"벨리르 강의 백조가 수도의 호수로 날아든 것이지요. 사교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겠군요."

수많은 목소리가 귓가를 자극해 왔다. 입지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중앙 사교계와 거리를 두는 편이 이롭다고 판단한 초대 후작의 뜻대로 리브리에가는 알티에라 제국이 칭제한 후로 줄곧 사교계에 진출하지 않아 왔다.그런데 대뜸, 작위를 이어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후작이 수도의 살롱에 모습을 드러내다니.저 멀리서 리브리에 후작을 힐끔거리던 귀족 영식 하나가 그림을 보고 있던 라일에게 조심스레 다가와 말을 걸었다.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황궁의 정원을 이토록 현실처럼 담아내다니."

라일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동의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황궁의 정원이라, 이런 틀에 박힌 그림에는 이제 흥미가 가질 않았다. 그는 마리에트의 아틀리에에서 봤던 그림을 떠올렸다. 나무를 타고 있는 다람쥐와 나무 아래 피어난 버섯들을 그려낸 그 투박한 그림을. 현실이라면 그쪽이야말로 현실적인 그림이지.라일은 그런 생각을 하며 듣기 좋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훌륭한 화가가 그린 그림이군요. 특히 이 빛 표현이 참 탁월합니다. 빛을 받아 다르게 보이는 색을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여러 색의 물감을 섞어 사용한 것도 인상적이고."

"보는 눈이 대단하십니다. 그런 디테일을 파악하시다니. 저는 자크 브로스라고 합니다. 리브리에 후작님이시지요?"

브로스 후작가의 영식이었나. 리브리에 후작령과는 거리가 꽤 있는 탓에 교류가 드문 가문이었다. 후작은 몇 번 본 적이 있기는 하다만, 그 자제를 보는 건 처음이군.

"라일 리브리에입니다. 브로스 후작가의 영식이셨군요. 부친과는 몇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영식 자랑을 많이 하시더군요."

상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그럴 만도 하지, 브로스 후작의 깐깐한 면모는 꽤 유명해서 몇 번 만나보지 않은 라일조차 알고 있을 정도니까. 그런 아버지가 자신의 자랑을 하고 다녔다는 얘기가 달갑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영광입니다. 그나저나, 후작님께서도 예술에 관심이 있으시었지는 몰랐습니다."

"하하. 알티에라 제국의 귀족된 자로서, 어떻게 예술을 등한시하겠습니까. 저 역시 작품을 감상하고 모으는 것에 취미가 있습니다."

"후작님께선 어떤 그림을 좋아하시는지 정말 궁금하군요."

라일은 미소를 지었다. 그 완벽하게 귀족적이며 다정해 보이는 미소에, 대화하고 있던 영식뿐만 아니라 주위의 귀부인들조차 흠칫할 정도였다.

"특정한 작품을 좋아한다기보다는, 요새 주의 깊게 보고 있는 작가가 한 명 있습니다."

마리에트, 마리에트 로지에. 이제 온 제국이 너의 이름을 알게 되겠지.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가 그리도 떠나고 싶어 했던 이 숨 막히는 새장 속에, 너를 다시 가두어 내 것으로 만들 것이다.그리고 알아내고야 말 것이다.내가 너에게 가지는 이 끈적하고 간지러운 감정의 정체를.

*

수도의 모든 티파티와 살롱들이 온종일 들썩거렸다.리브리에 후작의 등장, 그리고 그가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는 여류 작가의 존재. 알티에라 제국의 모든 귀족이 귀를 기울일만한 가십거리였다.여럿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소문은 커져만 갔고, 종국에는 꽤 자극적인 소문이 퍼져버리고 말았다.

'리브리에 후작이 미혼의 여류 작가를 후원하고 있다.'

*

소문의 당사자 중 하나인 마리에트는 한숨을 내쉬며 벨리르 숲에서 과일을 따고 있었다. 유화 물감도, 수채화 물감도 구하려야 구할 수가 없는 상황이니 뭐라도 해보려는 심산이었다.과일과 식물의 즙을 내어 그림을 그려볼 생각이었다.마리에트는 최대한 여러 색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꽃과 과일을 딴 바구니를 들고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돌아온 마리에트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 이게 뭐야?"

숲에 다녀온 그 짧은 사이에, 누가 다녀간 걸까? 오두막 문 앞에 꽤 고급스러운 재질의 상자 하나가 놓여있었다.가문에서 가져다 놓은걸까? 마리에트는 미심쩍었지만 일단 상자를 가지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아까는 보지 못했는데, 상자 위에는 백조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리브리에 후작가의 상징이었다.

'... 껄끄러운데.'

조심스러운 손길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고급 브랜드의 물감과 편지 하나가 동봉되어 있었다.

- 이전의 실수에 대한 사과의 마음입니다. 부담 없이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근래 발생한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리브리에 후작령의 미술 재료 수급이 어려워진 탓에 그대가 곤란할 것 같기에, 작은 오지랖을 부려보았습니다.존중과 호의를 담아, 라일 리브리에.

'정말 실수였던 걸까? 이 정도로 신경을 써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마침 곤란하던 차에 이렇게나 반가운 선물이라니. 리브리에 후작에 대한 경계심이 한층 누그러드는 기분이 들었다. 당장 작업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던 마리에트에게는 마치 구원자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렇게 비싼 걸 그냥 받기에는 좀..."

한순간에 솟구쳐 오른 호감도와는 별개로, 살짝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귀족과 엮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여전했고, 자신의 출신을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 또한 가시지 않았다.마리에트는 문득 궁금해졌다.그 남자의 진짜 속마음이.그저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는 이유로 넘어가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자신에게 호의를 보인다.무례한 태도조차 눈감아주고, 과분한 선물을 보내주는가 하면, 영내와 거리가 꽤 있는 편인 자신의 오두막까지 직접 찾아오기까지...

'... 설마...?'

그 남자가 나를 좋아하는 걸까?심장이 두근거렸다. 마냥 좋아서라기보다는, 뭐라고 해야 할까.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7화: 후원자



요즈음 마리에트의 아틀리에에 이상할 정도로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심지어는 오는 손님마다 뭔가 찝찝한 눈빛으로 마리에트를 흝어봤다. 무언가 기대하는 바가 있는 듯한 얼굴들. 익숙한 얼굴이었다.머리가 아팠다. 애벌칠용 석고 냄새 때문인지, 하루 종일 현기증이 났다.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 오늘도 왔네."

마리에트는 인기척이 사라진 후에야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아니나 다를까, 문 앞에는 고급스러운 상자가 가득 쌓여있었다. 리브리에 후작은 일전의 물감 선물 이후로 꾸준히 선물을 보내고 있었다.처음에야 반갑고 고마웠지만, 이쯤 되면 이젠...

"이걸 내가 받아도 되나...?"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마리에트는 사과 편지와 함께 받은 물감을 제외하곤 전부 고이 보관 중이었다.아무래도 의도가 불분명한 선물을 받아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고스란히 돌려줄 생각이었다.마리에트는 조금 남아 잘 나오지 않는 튜브를 힘껏 쥐어짰다. 한숨이 함께 새어 나왔다. 막상 바닥을 보이는 재료들을 보고 있자니, 방금까지의 다짐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마리에트는 고개를 저었다. 마리,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내일 한 번 더 번화가에 나가봐야겠다.'

마리에트는 물감을 팔레트에 짜서 말리는 동안 번화가에서 사 온 마지막 대리석을 조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마리에트는 도구들을 모아둔 상자에서 정과 끌을 꺼냈다.어디선가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조각가의 손은 돌 안에 잠들어 있는 형상을 자유롭게 풀어주기 위해 돌을 깨트리고, 그를 깨운다고.마리에트는 눈을 감고 대리석을 매만졌다. 이 돌 안에 잠들어있는 형상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그가 누군지부터 알아야만 했다. 그녀는 거침없이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

라일은 마차 안에서 생각했다. 그녀는 나의 호의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이쯤이면 충분히 경계를 거두었겠지. 흔들리는 차창 밖의 벨리르 강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이 강가를 따라가다 보면 나오는 작은 오솔길. 그 길의 끝에, 그녀가 있다.

"여기서 기다리도록."

라일은 오솔길 앞에서 마부를 멈춰 세웠다. 처음 이곳에 방문했을 때, 마차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한숨을 쉬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마차 바퀴와 말발굽에 눌려 꺾인 꽃과 잔디가 신경 쓰였나 보지.그는 오솔길을 걸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렇게나 자라있는 나무들, 발에 채는 솔방울과 도토리들. 뭐 하나 정돈돼 있는 게 없는 모습에 괜스레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그는 목을 죄어오는 셔츠 단추를 하나 풀었다.보인다, 그녀의 아틀리에가. 발걸음이 미묘하게 급해진다. 구두에 흙이 묻고, 멀끔하게 정리한 머리칼이 흐트러지지만 개의치 않는다.그는 문 앞에서 숨을 골랐다. 길고 곧은 손이 작은 오두막의 문을 두드린다.똑똑.오두막 안에서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토도도도, 작은 발이 나무 바닥에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가 들려온다.끼이익, 녹슨 경첩이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몇 번을 들어도 적응이 힘든 소리다.

"아, 안녕하세요."

마리에트가 이전보다 부드러워진 얼굴로 라일을 맞이했다.그녀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반바지 차림에 물감과 먼지로 지저분해진 앞치마를 두른 모습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잘 지내셨습니까."

라일은 완벽하게 신사다운 인사를 건넸다. 마리에트가 멋쩍은 듯 웃었다. 그녀의 뒤로 쌓여있는 검은 상자들이 눈에 띄었다. 라일이 사용인을 통해 보낸 선물들이었다. 상자들은 마치 열어보지도 않은 듯, 처음 보내던 그 상태 그대로였다.라일은 못마땅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녀의 안내에 따라 오두막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그녀가 대리석으로 무언가를 조각하고 있었는지, 무언가 형상을 갖춰가는 단계의 대리석이 작업대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 주변엔 쥐어짜여 꼬깃꼬깃해진 물감 튜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왜? 내가 부러 시간을 내어 고급 브랜드의 물감들을 직접 골라 부족하지 않게 보내주었건만. 라일은 미간을 미세하게 구겼다.

"저야 뭐... 늘 똑같죠. 그... 후작님은 잘 지내셨나요?"

라일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마리에트가 황급히 식탁으로 보이는 테이블 위를 정리하며 라일을 안내했다.

"일단 앉으세요. 차를 좀 내올게요."

보글보글, 물이 끓는 소리만이 오두막 안에 가득했다. 마리에트는 무언가 불편한 듯 손톱 끝을 만지작거렸다. 라일은 그런 모습을 보며 부러 아무 말도 없이 미소만 지어 보였다.당차고 뻔뻔한 그녀가 이토록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정말 악취미로군. 라일은 스스로에게 약간 회의를 느끼면서도 그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다가 조용히 입술을 뗐다.

"제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 봅니다."

마리에트가 씁쓸히 웃었다.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아, 아니에요. 정말 감사하고 좋은 선물이지만... 후작님께서 제게 이런 걸 주시는 이유를 알 수 없어서요. 함부로 쓸 수가 없었어요."

"꼭 이유가 있어야 할까요?"

라일의 질문에 마리에트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글쎄요. 저는 이유 없는 과한 호의는 딱 질색이라서요. 심기가 불편하셨다면 죄송하지만, 도로 가져가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 라일은 그녀의 말대로 심기가 불편했다.이유 없는 과한 호의가 싫을 이유는 무엇이며, 제게 가장 필요한 것을 제공했건만 왜 다시 돌려주려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만난 보통의 인간들은 모두 제게 바라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걸 쥐여주면 금세 자신을 추앙했다. 그게 당연했다. 그런데 왜 저 꼬질꼬질한 여자 하나가 제 맘대로 되질 않는지, 속이 답답했다.

"... 이유라면 있는 것도 같습니다."

마리에트의 흔들리지 않는 눈빛을 보고 있으니 괜한 심술이 났다. 귀족으로서의 자긍심 같은 거라도 남아있나? 그래봤자 몰락해 가는 가문의 천덕꾸러기 영애 주제에.라일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신문이었다. 신문의 1면에는 큰 글씨로 익숙한 이름이 적혀있었다.

- 젊은 후작, 라일 리브리에. 무명의 여류 화가를 후원하고 있다고 밝혀져... 리브리에 후작의 그녀, 과연 그 실체는?

"... 설마, 이 여류 화가가...?"

"아마 그렇겠지요."

마리에트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귀족과 엮이기 싫다더니, 저 정도로 싫어할 줄이야.라일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일전의 그 무례한 귀족이 소문을 낸 것 같더군요. 소문의 내용이 꽤 악의적인 걸로 보아."

"악의적이라니요? 대체 무슨..."

라일이 안타깝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차마 입에 담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신문을 마리에트 쪽으로 밀었다.

"마저 읽어보시지요."

마리에트는 미간을 구기며 신문을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한 문장, 한 문장 읽어 나갈수록 그녀의 얼굴에서 혈색이 사라져갔다. 기사의 말미를 읽을 때쯤엔 거의 시체 같은 얼굴이 되어있었다.그럴 만도 하지. 제국에서 가장 자극적인 기사를 쓰는 걸로 유명한 언론사의 신문이었으니까.라일이 의도한 것보다 훨씬... 천박한 논조의 기사가 실리긴 했지만, 마리에트 로지에에게 충격을 주기에는 충분하겠지.

'... 저택으로 돌아가는 대로 언론사를 정리하도록 해야겠지만.'

물론 가만둘 생각은 아니었다. 리브리에와 마리에트에 대한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걸 의도하고 행동하긴 했으나, 이런 싸구려 가십지 따위에 실려 품위가 손상되는 꼴은 봐줄 수가 없었다.충격에 빠진 얼굴로 기사를 읽은 마리에트가 떨리는 입술로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 어떻게..."

어떻게 하면 좋냐는 거겠지. 그녀는 한 문장조차 쉬이 내뱉지 못할 만큼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손과 턱이 덜덜 떨릴 정도였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일이 떨리는 마리에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저 더러운 소문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모두에게 입증해 보이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리에트의 떨리는 눈동자가 라일을 향했다. 짙은 올리브색 눈동자에 비친 라일은, 더없이 다정하고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당신을 후원하겠습니다. 리브리에 후작으로서."

마리에트의 손등 위로 겹친 라일의 손에 묘하게 힘이 들어갔다.마치 그녀가 손을 빼낼 수 없게 하려는 듯이.

"그리고 모두에게 보여주면 됩니다. 우리의 관계가, 아주 숭고하고 아름다운..."

라일의 낮고, 짙은... 관능적인 목소리가 작은 오두막 안에 울려 퍼졌다.

"예술로써 맺어진 관계라는 걸요."








8화: 자유



"...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귀족이랑 엮이기 싫다고 하셨었죠."

라일의 짙은 남청색 눈이 번뜩였다. 마리에트는 그 눈이 두려웠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디까지 꿰뚫어 보는지 알 수 없는 그 눈이 두려웠다.

"... 알고 계시니 더 긴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알티에라 제국에서, 예술을 하면서, 귀족과 엮이지 않겠다는 게."

"전 이미 그렇게 살고 있었어요. 우연히 찾아온 손님이 백조 그림을 사 가고, 그걸 받은 후작님께서 찾아오시기 전까지는요."

마리에트의 말에는 묘한 원망이 섞여 있었다. 지금, 나 때문에 제 일상이 망가졌다는 이야기하고 싶은 건가? 그는 이내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다시 생각했다.그렇다면 내가 바라는 대로 되고 있다.나는 너의 날개를 꺾어 새장 안에 가둘 것이니.

"... 제가 찾아오는 것이 불편하셨습니까?"

라일은 꾸며낸 목소리와 얼굴로 침통하게 물었다.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려는 속셈이었지만 마리에트는 굴하지 않고 대답했다.

"네, 불편합니다. 특히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수시로 드나드는 미혼의 귀족 남성에게 따라붙을 그 찝찝한 이야기들이 말이죠."

"그래서 그 찝찝한 이야기들을 떨쳐낼 방법을 제시하지 않았습니까?"

"전 누군가의 후원을 받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아요. 편하겠죠. 돈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되겠고요. 하지만, 저는 제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고, 제가 하고 싶은 조각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 말하는 마리에트의 눈빛이 찬란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라일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대체 무엇이 그녀를 저렇게까지 빛나게 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후작님, 제게 주신 그 마음과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자유로이 살고 싶습니다. 마음의 빚을 떠안으면서까지 그림을 그리고 싶진 않아요."

아, 자유였구나. 내게는 없고 그녀에게는 있는 것이. 내가 궁금해하고, 질투하고, 갈망했던 것이. 라일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가졌던 감정의 윤곽이 드러나자, 스스로가 더없이 초라해지는 것만 같았다.

"...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오늘은 돌아가겠습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라일은 간신히 표정을 유지하며 인사를 건넸다. 몸을 돌려 오두막을 빠져나온 라일은 이를 악물었다.모멸감이 느껴졌다. 모든 걸 가졌다고 생각하며 살아왔건만, 저런 한미한 가문의 영애조차 가진 것을 손에 쥐지 못한 채 살아왔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다.

"... 기분 한번 더럽군."

라일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이렇게나 풀어진 모습을 보였다니. 수치스러웠다. 풀어헤친 단추를 다시 끼워서 맞추고 머리를 정돈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우아하고 조용한 발걸음으로 오솔길을 빠져나가 마차에 몸을 실었다.

*

종이 울리자, 문밖을 지키고 서 있던 집사가 몸을 떨었다. 그의 주인은 늘 합리적이고 영리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었지만, 요즘은 아니었다.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귀족 출신의 예술가 계집 하나를 감시하라는 명령을 내리질 않나, 마차 사고를 사주하고 그 피해자 가족의 입막음을 시키질 않나. 어딘가 단단히 잘못되고 있었다. 틀림없이.

"예, 부르셨습니까."

신문 한 부가 발치에 날아들었다. 유치하고 자극적인 논조의 기사를 싣는 것으로 유명한 언론사의 것이었다.

"폐간시켜."

"... 예?"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명령에, 참지 못하고 반문해 버린 제 주둥이가 원망스러웠다. 눈앞의 남자, 라일 리브리에의 표정이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두 번 말해야 하나?"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아, 그리고..."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로지에 백작에게 연락을 취하도록."

*

여름이 저물어가나보다. 필립의 화방 옆 담장을 타고 자란 능소화가 시들해졌다. 필립은 아직도 몸이 좋지 않은지, 화방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마리, 오늘도 필립을 보러 온 거니?"

알리야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 네. 오늘도 피터 때문에 얼굴은 못봤지만요."

필립의 남동생, 피터는 왠지 마리에트에게 화가 나 있는 듯했다. 그녀가 찾아올 때마다 와락 화를 내며 축객령을 내렸으니까.알리야는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마리에트의 등을 토닥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곧 괜찮아질 거야. 벌써 몇 주나 지났잖니. 피터는 아마... 필립이 안정을 취하길 바라서 그러는 걸 거야."

"그랬으면 좋겠는데요. 이제는 조금 불안해요. 필립이 저한테 화가 나서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으면 어떡하죠?"

마리에트의 말을 들은 알리야는 긴말은 하지 않고, 자신이 들고 있던 장바구니에서 빵과 과일을 꺼내 마리에트에게 안겨주었다.

"너 야위었다. 마리. 좀 쉬어."

마리에트는 알리야가 준 음식들을 들고 강가를 따라 걸었다. 오늘따라 바람이 찼다. 해는 짧아져서 금세 노을이 내려앉았고, 풀들은 더 억세져 마리에트의 발목을 거세게 긁어댔다.온 세상은 예쁜 주황빛으로 물들었는데, 마리에트의 마음은 요란스럽고 어지러웠다. 스캔들이라니, 그것도 미혼의 고위 귀족과! 이 말도 안 되는 소문의 여파가 두려웠다. 아마 아버지의 귀에도 이 소문이 이미 들어갔겠지.

'이사를 해야 하나?'

마리에트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그녀는 강가의 풀밭에 대충 손수건을 깔고 그 위에 앉았다. 그리곤 주변을 둘러봤다.때마침 여름 철새들이 무리를 지어 벨리르를 떠나고 있었다. 짙은 녹음은 살짝 가라앉은 주황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벨리르의 여름이 저물어가고 있었다.물론 그녀는 벨리르의 사계절을 모두 사랑했지만, 그중에서도 유별나게 사랑하던 그 여름이 지나가는 것이 꽤 씁쓸한 기분을 들게 했다.마리에트는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자신이 사랑하던 벨리르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바람이 싸늘해질 때쯤,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느새 저 아득한 곳에서 달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겼다. 길게 뻗어 쉴 새없이 흐르는 강물을 따라 걸었다.

'... 짐을 챙기자. 그림과 조각은... 알리야에게 맡기고... 작품을 판 돈은 알리야가 잘 쓰겠지. 필립에게 인사는 하고 싶었는데.'

그녀는 다짐했다.자신의 아버지가 찾아오기 전에 이곳을 떠나자고.물론 별 소용은 없는 다짐과 고민이었다. 그녀가 오솔길을 따라 걸어 도착한 오두막의 문 앞엔, 익숙하고 또 낯선 이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 아버지?"

마리에트의 부름에 고개를 돌린 남자, 가브리엘 로지에 백작이 코웃음을 쳤다. 그는 자기 딸의 행색에 기가 찬다는 듯, 위아래로 훑어보곤 입을 열어 날카롭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내놓아도 창피한 행색을 하고 다니는구나. 마리에트 로지에."

"아버지는 제가 드레스를 갖춰 입고 있던 시절에도 저를 창피하게 여기셨죠."

마리에트는 자신에게 모욕을 주는 부친의 말에 이를 악물며 대꾸했다. 꼭 쥔 오른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왜 오셨어요?"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고, 아비가 딸을 찾아온 게 못마땅해 축객령을 내리려는 게냐?"

"그것도 몰라서 묻는 건 아니실 테지요. 제가 가문을 떠날 때, 제게 했던 말씀을 기억하고 계실 텐데요."

- 너는 이제 내 딸이 아니다.

로지에 백작은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제 딸을 보며 혀를 찼다. 표독스럽긴.

"그걸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느냐?"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귀족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마리에트가 쏘아붙였다.그녀는 이 상황에서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교묘하게 자신의 자존감을 갉아먹고, 자신의 능력을 깎아내려 아무것도 못 하는 인형으로 만들어 부유한 가문에 팔아넘기려던 이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게 괴로웠다.

"이런 시답잖은 말싸움은 그만두자꾸나, 마리에트. 듣자 하니 네가 리브리에 후작가의 후원을 받는다던데."

그러면 그렇지. 이런 인간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가브리엘 로지에는. 제 부인도, 딸과 아들도 모든 게 자신의 출세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돌아오거라. 무려 그 '리브리에 후작'의 후원을 받는 여식이 이런... 다 볼품없는 곳에서 지내는 건 보기에 좋지 않을 거다."

"상관없어요. 리브리에 후작님과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니거든요."

"... 뭐?"

"제가 거절했다고요. 그 후원."

로지에 백작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 너도 이 알티에라 제국에서 귀족의 후원을 받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지 않니?"

"그럼요. 작품 활동에 필요한 모든 걸 제공받고, 가문의 일원으로 대접받는 아주~ 영광스러운 일이죠."

"그걸 알면서...!"

"... 하지만, 제가 원하는 예술을 할 수는 없죠."

마리에트가 숨을 고르고 말을 이어갔다.

"저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서 가문을 떠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생각은 없어요. 제게 바라는 게 뭐든 간에, 떠나세요. 아버지 뜻대로 될 일 없을 테니."

로지에 백작의 눈에 흉흉한 이채가 돌았다. 그럼 그렇지, 이런 말을 듣는다고 포기하고 돌아갈 아버지가 아니었다.기분 나쁠 만큼 자신과 닮은 올리브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로지에 백작이 손짓하자, 마차 곁에 서 있던 사용인이 마리에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9화: 사냥개



"아가씨, 백작님 말씀대로 하시지요. 여린 아가씨가 홀로 지내시기엔 너무 위험한 곳입니다."

마리에트는 숨을 골랐다. 자신이 처한 폭력적인 상황에 겁이 났지만, 그럼에도 마리에트는 겁내지 않고 맞섰다. 부러 화가 난 표정을 짓고, 떨리는 손에 힘을 주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더 다가오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두렵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않아야 했다. 사용인의 말처럼, 여린 여자가 홀로 살아가는 세상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었으니까.

"절 아직도 철부지 어린아이로 보시네요, 아버지. 저를 회유하지는 못할망정, 이리 겁박을 하시다니... 혹시 제가 겁이라도 먹을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로지에 백작의 눈빛이 한층 험악해졌다. 심기가 불편한 듯 흐음 소리를 낸 백작은 한 손을 들어 사용인을 멈춰 세웠다.

"감히, 이 아비와 협상이라도 하겠다는 게냐?"

"그러지 못할 이유라도 있나요?"

마리에트가 짐짓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대꾸했다. 성대가 떨려왔지만, 안간힘을 쓰며 멀쩡한 목소리를 뱉어냈다.

"제게 원하시는 게 무엇이든, 이런 강압적인 태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거예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세요."

마리에트의 축객령을 들은 로지에 백작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그는 화를 억누르며 헛웃음을 쳤다.

"하...! 내가 널 단단히 잘못 키웠구나. 오늘은 네 청을 들어 돌아가겠다만, 그 버르장머리 없는 태도는 고치는 게 좋을 게다."

로지에 백작이 불편한 기색을 잔뜩 풍기며 발을 돌렸다. 마리에트는 그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사용인은 고개를 깊이 숙여 그녀에게 사죄의 인사를 건넨 후 백작을 따라갔다.이 짧은 소란 끝의 벨리르 숲은, 여전히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오직 마리에트의 머릿속만을 제외하고.그녀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밤새 지난날의 흉터가 욱신거려왔다.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둔 끔찍한 기억들이 신경을 건드렸다.그녀는 이 끔찍한 것들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고민했다.

'... 어떻게 해야 아버지가 내게 접근하지 못할까.'

아버지가 모르는 곳으로 떠나버린다? 이제 와선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올 만큼 내게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는 아버지가 나를 그냥 놓아줄 리가 있나.그렇다면... 마리에트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마리에트."

그것만은 안 되지. 안되고말고.

*

"로지에 백작이 이미 영애와 접촉했다고 합니다."

"... 빠르기도 하군, 약삭빠른 인간답게."

장갑을 낀 라일의 손가락이 책상 위를 두드렸다. 무언가 깊이 생각을 할 때면 나오는 습관 중 하나였다.

"그 밤에 굳이 달려와서 할 얘기가 대체 뭐였길래."

그가 묘한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분명 로지에 백작을 이용해 마리에트를 압박할 생각이긴 했지만, 그것도 내가 직접 컨트롤할 때나 달가운 일이지. 완전히 통제되지 않은 상태로 벌어진 변수는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 이만 돌아가도록. 백작에게는 내가 직접 서신을 보내도록 하지."

집사를 물린 라일은 생각에 잠겼다. 자유를 갈망해 가문을 버린 여자. 마리에트 로지에.너는 그 자유를 위해 무엇까지 할 수 있을까. 아니, 나는 널 구속하기 위해 무엇까지 할 수 있을까. 라일은 서랍을 열어 편지지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선 유려한 필체로 무언가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 친애하는 로지에 백작에게.

*

라일이 느낀 로지에 백작에 대한 첫인상은 이러했다.

'뱀같이 교활한 구석이 있지만, 어설픈 인간.'

"정말 영광입니다. 후작님께서 먼저 연락을 주시다니요."

로지에 백작은 꽤 체면을 차릴 줄 아는 이였다. 물론, 그가 도박에 빠져 가문을 몰락시킨 얼간이라는 사실을 아는 라일에겐 그저 우스워보일 뿐이었지만.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저야말로 이 만남을 고대해 왔습니다."

라일은 찻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곤 잠시간 말을 고르는 듯, 로지에 백작을 응시했다.

"제가 만남을 청한 이유를, 대충은 짐작하고 계실 테지요."

로지에 백작이 겸연쩍게 웃었다. 마치 이 대화가 썩 불편하다는 듯. 그는 딸을 끔찍이 아끼는 아버지라도 되는 것처럼 걱정 어린 음성으로 대답했다.

"... 제 딸아이에 대한 이야기겠지요."

"일단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제가 처신을 잘못한 탓에, 영애와 로지에 백작가에 누를 끼쳤습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딸 교육을 잘못시킨 탓이지요. 홀로 예술을 하겠다며 가문을 박차고 나설 때 붙잡지 못해 결국 후작님의 명성에 흠집을 내고야 말았군요."

"그 정도로 흠집이 날 만큼, 리브리에의 명성은 가볍지 않습니다. 다만... 영애가 홀로 감당해야 할 이야기들이 걱정될 뿐이지요."

"저도 아비로서 참 염려가 많습니다. 혼기가 찬 여식이 저리 밖으로 나도는 것도 걱정이건만, 이리 불미스러운..."

로지에 백작은 말 끝을 흐렸다.속이 훤히 보이는 인간. 라일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 불미스럽다라. 당연히 그렇게 느끼실 수도 있겠지요. 다만, 백작께서 염려하실 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저 제가 영애의 작품에 깊은 감명을 받아 후원을 제안했고, 영애가 거절했을 뿐입니다."

마리에트가 자신의 후원을 거절했다는 대목에서 로지에 백작의 입가가 묘하게 뒤틀렸다. 라일은 꽤나 흡족했다. 로지에 백작이 자신의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행동을 보이고 있기에.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로지에 백작의 동공이 번뜩였다. 부탁이라니, 그 리브리에 후작이. 한몫 챙길 수 있겠구나. 추잡스러운 생각들이 훤히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미 사과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두 번이나 고개를 숙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닙니다. 작위를 떠나 제가 로지에 백작가에 끼친 피해를 생각하면, 지금은 제가 고개를 숙이는 것이 도리이자 이치이지요."

로지에 백작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알기 쉬운 인간이라 다행이군. 후작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이 광경에 흡족한 듯 보였다.

"... 그나저나, 제 딸의 그림에서 대체 뭘 보셨기에... 후원까지 결심하신 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 그저, 그 어떤 화가와 견주어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기에."

라일은 말을 아꼈다. 한심하게도 제 딸의 빛나는 재능조차 간파하지 못하고 의심하는 안목을 가졌다니. 저러니 노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말아먹었지.라일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헛웃음을 치는 로지에 백작의 얼굴이 퍽 불쾌하고 얄밉게 느껴졌다.

"... 영광이군요. 제 딸아이가 그렇게나 훌륭한 그림을 그리는 줄은 몰랐습니다."

"백작께서는 예술에는 영 취미가 없으신가 봅니다."

라일의 말에 로지에 백작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자기 말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이 꽤 우스웠지만, 겉으로 티내진 않았다.

"... 이런저런 얘기는 나중에 나누기로 하고, 본론으로 넘어가 보도록 하지요. 백작님께서도 공사다망하시지 않습니까."

라일은 부러 백작이 대꾸할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마리에트와 닮은 얼굴로 멍청하고 비굴하게 구는 꼴을 보는 것이 썩 유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영애에게 따라붙은 험한 소문들이 신경 쓰이시겠지요."

퍽이나. 로지에 백작의 관심사는 마리에트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라일은 그녀의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안 그래도 휘청이는 로지에 백작가의 재정과 명예 또한 큰 걱정거리이실테고..."

"그... 그건...!"

로지에 백작의 얼굴이 보기 좋게 무너졌다.

"그 두 가지 고민을 한 번에 해결할 방법이 있다면, 그리고 그걸 제가 해드릴 수 있다면... 제가 백작가에 끼친 피해를 모두 보상할 수 있겠습니까?"

"... 그 방안이 뭔지나 들어보지요."

방금까지 굉장한 모욕을 당했다는 듯이 표정을 구기던 로지에 백작의 태도가 달라졌다. 마치 자신의 부와 명예를 위해 딸마저 팔아넘기겠다는 장사꾼 같은 태도에 라일조차 진저리가 났다.마리에트가 가문을 떠난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이 잠깐의 만남만으로도 로지에 백작의 역겨운 면모에 질릴 정도였으니.

"백작께서 어떻게든 영애를 설득해 주시지요."

그가 마리에트를 설득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그게 가능했더라면, 마리에트가 벨리르 숲의 작은 오두막에서 홀로 지내고 있지는 않았겠지. 그는 그저 마리에트를 피로하게 만들, 사냥개 같은 것이었다. 그녀를 궁지로 몰아넣을.그럼, 그녀도 결국 그 잘난 자존심을 꺾고 내게 기대올 테다. 내게 오지 않는데도 괜찮았다. 그녀가 돌아갈 곳을 하나도 빠짐없이 무너뜨리면 될 일이었으니.







10화: 올가미


​​

로지에 백작이 손톱을 물어뜯으며 다리를 떨어댔다. 리브리에 후작의 달콤한 제안에 눈이 돌아 대책도 없이 승낙하기는 했는데, 대체 어떻게 그 고집 센 계집을 설득해야 할지 앞날이 막막했다.

"쯧, 그 버릇없는 것을 대체 어떻게 설득하느냔 말이야."

제 피를 이어받은 제 딸이지만, 마리에트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아이였다.고집불통에, 계집 주제에 같지도 않게 예술을 하겠다고 설치질 않나. 제 남동생이 듣는 수업이란 수업은 다 자기도 함께 듣겠다며 설쳐댔다.자고로 귀족가의 여식이란 늘 단정하고, 예법을 지키며 항상 다소곳해야 하거늘, 제 딸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로지에 백작은 자신의 형편없는 딸자식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제 남동생의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좋았을 것을.

"어머, 여보.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안색이 어두운데."

때마침 그의 아내가 서재 문을 열고 들어왔다.메릴 로지에. 썩 아름답지도, 그렇다고 추하지도 않은 그 점이 가브리엘 로지에의 마음에 드는 여자였다. 적당히 체면을 차릴 수는 있으나 밖으로 나돌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여자.

"... 당신, 마리에트랑 연락되나?"

"아뇨, 제가 주기적으로 편지를 보내긴 하는데..."

메릴은 답장을 받은 적은 없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로지에 백작은 깊게 신음했다. 아무래도 아카데미에 있는 아들에게 연락을 취해야 할 것 같았다.

"... 마리에트, 그것이 부모에겐 매정해도 제 동생 하나는 끔찍이도 아꼈었지."

가문, 아니. 제 누나의 명예를 위한 것이니 아들도 기쁜 마음으로 도와주겠지.로지에 백작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

바스락.어느새 저물어간 여름의 흔적들이 즈려 밟히며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알티에라 아카데미의 교정은 사계절 내내 아름다웠지만, 유독 가을에 더욱 아름다웠다. 장밋빛 벽돌로 지어진 건물과 외벽을 타고 자란 덩굴 식물들, 넓은 공원과 화려한 분수대까지. 예술과 자연을 숭상하는 알티에라 제국이 추구하는 모든 미학을 응축시켜 놓은 듯한 풍경이었다.

"에밀, 이번 방학에도 본가에는 가지 않을 작정이야?"

"응. 기숙사에 남으려고."

"입학하고 나서 한 번도 안 갔잖아. 부모님이 걱정하실텐데."

"... 음. 한 학기만 지나면 졸업인데, 뭘. 연락도 없으시고."

제 아버지와 누나를 닮은 헤이즐 색 머리와 올리브색 눈동자를 가진 미청년, 에밀 로지에가 싱긋 웃으며 제 친구에게 대꾸했다.그는 짐 가방을 들고 교정을 떠나는 친구에게 손을 흔들며 배웅을 한 뒤, 조용히 자신의 기숙사 방으로 돌아왔다. 기숙사 방문 앞, 작은 우편함에는 고급스러운 벨벳 소재의 봉투 하나가 꽂혀있었다.

'편지? 누가 보낸 거지?'

봉투를 꺼내 들자, 그 위에 찍혀있는 인장이 보였다. 장미 덩굴 문양. 자신의 가문인 로지에 의 문장이었다.에밀은 고개를 갸웃하며 편지봉투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무려 7번의 학기를 보낼 동안 학비는커녕 상투적인 연락이나 몇 번 보내던 부모님이, 대체 왜?에밀은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 문단을 읽을 즈음에는, 그 유려한 얼굴에 어마어마한 분노가 깃들어있었다.

"... 말도 안 돼. 누님이 그럴 리가."

에밀은 황급히 짐을 챙겼다. 아무래도 자신의 누이에게 아주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 것 같았다.

*

"... 또야?"

마리에트는 가득 찬 우편함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대부분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온 편지였고, 개중 몇몇은 이전에 알고 지냈던 귀족 영애들이 보낸 편지였다.... 이래서야 시골 마을까지 와서 지내는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영애들은 대체 어떻게 내 거처를 알아낸 거지? 마리에트는 고개를 저으며 편지들을 챙겨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그리곤 대충 머리를 올려묶고 캔버스 앞에 앉아 작업을 시작하려던 순간,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마리에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문 앞으로 다가섰다. 제발, 그 사람만은 아니길. 마음속으로 소심한 기도를 올린 마리에트가 문을 열어젖혔다.

"... 에밀? 여긴 어떻게..."

그 앞에 서 있던 건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에밀 로지에. 그녀의 남동생이자 그녀가 유일하게 정을 붙인 혈육이었다.

"누님...!"

에밀은 마리에트를 보자마자 환히 웃으며 안겨 왔다. 마리에트가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데도, 에밀은 어린아이처럼 안겨들었다.마리에트는 그런 에밀을 꼭 안아주면서도 등짝을 후려치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야, 너...! 아카데미에 있어야 할 놈이 왜 여기까지 왔어?! 내가 있는 곳은 어떻게 알았고...!"

"... 어머니가 알려주셨습니다. 누님께서 험한 일을 겪으셨으니, 제가 찾아가서 살펴보라고... 아카데미는 방학이고요."

이런 미친. 마리에트는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아무래도 자신으로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아버지가 동생을 이용한 것 같았다.

"... 험한 일은 무슨. 방학이면 본가에 가서 쉴 것이지, 뭐 하러 이런 시골까지 왔대."

이 상황이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오랜만에 동생을 만난 것만큼은 기꺼운 일이었다.

"... 일단 들어와. 좀 좁겠지만."

집 정리 좀 해놓을걸. 마리에트는 황급히 통행을 방해하고 있던 이젤과 캔버스들을 구석으로 몰아넣기 시작했다.에밀은 조용히 주변을 살피며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주변에 걸려있는 마리에트의 그림들과 조각들이 신기한 듯, 가까이 다가가 스윽 만져보기도 했다.

"... 아무리 생각해도 아카데미는 제가 아니라 누님께서 가셔야 했습니다."

에밀은 항상 마리에트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 예술을 배우고 싶어 한 것도, 재능을 가진 것도 누이인데, 오로지 가문의 후계자라는 이유로 자신이 그 자리를 빼앗은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었다.분주하게 차를 준비하던 마리에트가 움찔했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별소리를 다 한다. 너도 알잖아. 아버지 성격. 그게 어디 네 탓이니? 신경 쓰지 마."

"하지만, 저는 재능이 없는걸요."

마리에트가 에밀의 어깨를 가볍게 톡, 쳤다.

"그런 애가 수석을 하니? 그리고 무엇보다 너랑 나는 분야가 다르잖아."

"그렇지만, 누님의 그림이야말로 아카데미에서도 최고 수준일 텐데..."

물론, 억하심정이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분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에밀은 충분히 재능이 있고, 똑똑한 아이였다. 아카데미의 문예과에서 수석을 유지하며 장학금을 한 번도 놓치지 않은 아이니까. 마리에트는 에밀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나저나, 아버지도 참 영악하시지.'

제가 에밀에게 유독 약해진다는 걸 알고 일부러 보낸 것일 거다.마리에트의 맞은편에 앉은 에밀이 차를 홀짝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그 누님, 리브리에 후작의 후원은 왜 거절하신 겁니까?"

사실 좀... 민망스러운 소문이 돌고 아버지가 찾아온 걸 빼면 큰 일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는 헤프닝이었는데, 에밀에게 대체 뭐라고 얘길 했기에 애가 저렇게 걱정과 염려가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냔 말이다.

"... 별거 아니야.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대도."

"제가 어떻게 신경을 안 씁니까. 누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후원이라는 건..."

"에밀. 나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집을 나왔어. 너도 알잖아."

에밀의 고개가 떨궈졌다. 아카데미 2학년생이던 시절, 누이가 보냈던 편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자신이 살아갈 곳은 스스로 정하고 싶다고 했었지.그의 누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무언가에 구속되는 것은 끔찍하리만치 싫어하는 사람. 그게 가문이든, 예법이든 간에.

"후원을 받으면... 물론 좋은 일이 많겠지.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고, 모두가 나를 우러러볼 거야. 무려 리브리에 후작가의 후원을 받는 화가라니."

마리에트가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밀을 바라보곤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건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없어. 에밀."

"... 물론 저 또한 누님의 행복만을 바랍니다. 그렇지만... 누님의 명예 또한 제게는 중요합니다. 모르는 이들의 입방아에 올라, 차마 생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이야기가 오가는 것은... 괴롭습니다."

에밀은 고개를 떨궜다.... 확실히 효과가 있긴 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에밀은 아직도 대여섯 살쯤의 어린아이 같기만 했으니까.

"... 에밀."

"강요는 아닙니다. 전 누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지지하고 응원하지만..."

그녀의 동생이 한참 말을 고르는 듯하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누님께서 저의 평안을 바라는 것만큼, 저 또한 누님의 평안을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 홀로 지내는 누님에겐... 저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많은 어려움이 찾아오겠지요."

"저는, 아직 그 짐을 함께 짊어질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마리에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에밀이 자신을 잘 따르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속이 깊은 줄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누님이 후원을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11화: 목줄



"에밀, 네 말은 잘 알겠으니까..."

마리에트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자신을 생각하는 동생의 극진한 마음을 직접 듣게 된 건 꽤 감동적이었지만...

"제발 방에 들어가서 잠 좀 자. 너 그러고 밤이라도 샐 작정이니?"

"... 아닙니다."

에밀은 제가 답을 주지 않으면 꼼짝도 하지 않겠다는 듯, 밤이 늦도록 침울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마리에트는 구겨진 미간을 어루만지며 신음했다. 저걸 어쩌면 좋담. 그렇다고 에밀을 달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 그래도 후원은 좀... 더 생각해 봐야지. 보통 일이 아닌데.'

물론, 이런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도 않았다.

"... 너 알아서 해. 나는 잘 거니까. 저 방에 이불이랑 베개 넣어놨어."

마리에트는 에밀의 앞에 따뜻하게 데운 우유 한 잔을 내밀었다. 작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은 그녀는 침실로 들어갔다.마리에트는 올려 묶었던 머리를 풀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마리에트가 푸르르, 입술을 떨며 괴상한 소리를 냈다.

'고집 센 건 알았지만, 저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지. 아버지는 대체 무슨 얘기를 했길래 애가 저렇게까지 굴어?'

짜증이 났다.저 순한 애를 구슬려서 나를 마음대로 주무르려는 그 더러운 속셈이.물론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면, 리브리에 후작의 제안이 나쁠 건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순간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된다는 그 사실과...

'... 아무래도, 좀 그렇잖아.'

약혼자까지 있는 젊은 후작의 후원이라니. 검증되지 않은 소문 하나만으로도 더러운 소문들이 쏟아지는 걸 봤는데.알티에라 제국에서의 후원이라는 건, 그만큼 중대한 사항이었다.

'돈과 명예를 줄 테니, 네 삶과 작품 세계를 구속하겠다.'

라는 일종의 계약이라고 해야 할까. 받기만 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는 얘기였다. 후원자의 입맛에 따라 그림을 그려야 했고, 원한다면 기꺼이 액세서리가 되어 사교계에 나가 직접 '전시 물품'이 되기도 하는 그런 것이었다.어지간히 대단한 예술가가 아니고서야 후원자를 찾기 어려운 이유도 그 때문이었고, 어지간한 대부호가 아닌 이상 예술가를 후원하는 일이 쉽지 않은 것 또한 그 때문이었다.

'물론 나는 대단한 예술가가 아니지만...'

마리에트는 잘 빗고 있던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헝클어 버리곤 침대에 풀썩 누워버렸다.복잡한 생각은 딱 질색인데, 어찌 된 게 요즘 들어 복잡한 생각만 하게 되는 것 같았다.

*

"... 에밀? 이게 다 뭐야?"

"... 일찍 시장에 나가서 재료를 좀 사 왔습니다."

세상에, 저 낡은 테이블이 무너지지 않는 게 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정말... 시장에 있는 재료란 재료는 다 털어와서 요리한 건가 싶었다.

"... 돈이 어디서 나서."

"장학금을 받아서 저축해놓은 돈이 있습니다."

내가 미쳤지. 조금 더 일찍 일어날걸. 동생이 밥을 차리게 한 것도 모자라서, 학교에서 쓰기에도 모자랄 돈까지 털었단 말인가.마리에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음식은 먹겠지만.에밀이 차려놓은 음식들은 하나같이 정갈하고, 엄청나게 맛있는 냄새가 났다.

"... 잘 먹을게. 그리고, 돈 쓰지 마. 학교에서 쓸 돈도 모자랄 텐데."

마리에트는 짐짓 어른스러운 척, 에밀에게 감사와 약간의 질책을 건넨 후 스튜를 떠먹었다.

'... 얘가 요리를 대체 왜 잘하지?'

그 와중에 또 어디서 찾아 맸는지, 야무지게 앞치마까지 하고 있던 에밀이 앞치마를 벗어 정리하며 맞은편에 앉았다.

"돈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성적 우수생이라 매달 소정의 생활비도 함께 지급됩니다."

... 그런 거라면 에밀이 나보다 돈이 많을지도 모르겠다.그렇게 간만에 에밀과 마주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하며 식사하려던 그때, 달갑지 않은 소리가 또 들려왔다.똑똑.이젠 이 소리만 들려도 두통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제가..."

"앉아 있어. 내 집이야."

제가 대신 나가겠다며 몸을 일으키는 에밀을 말린 후, 마리에트는 숄을 걸치고 문을 열었다. 부쩍 차가워진 건조한 가을바람이 들이닥쳐왔다.

"... 일찍부터 무슨 일이세요?"

할 일도 없나. 허구한 날 찾아오는 리브리에 후작이었다.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자꾸 찾아오는 게 불편하단 얘기를 한 지 얼마나 됐다고.

"... 손님이 계셨군요."

후작의 시선이 마리에트를 지나 등 뒤의 에밀에게 꽂힌다. 마리에트는 몸을 움직여 후작의 시선을 가로막았다.이렇게까지 반응할 일은 아니었는데, 에밀을 바라보는 후작의 시선이 왠지 모르게 날 서 있었고, 그것이 퍽 신경 쓰였다. 그가 무언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마리에트는 부자연스럽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 제 남동생입니다. 아카데미가 방학이라서요."

"... 남동생이 아카데미에 다니십니까."

'... 미치겠네, 진짜! 이놈의 주둥아리...!'

아뿔싸, 알티에라의 아카데미는 귀족만이 다닐 수 있다는 걸 까먹고 있었다.마리에트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자, 리브리에 후작이 양손을 들어 악의가 없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 그대의 가문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물론 소문을 낼 생각은 없고 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미 자신의 출신을 알고 있었다.대체 어떻게? 물론 지금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나저나, 남동생이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리브리에 후작이 묘하게 더 무거워진 목소리로 남동생에 약간의 악센트를 주어 이야기했다.... 이런, 밉보여서 좋을 건 없으니...

"... 에밀, 인사드려. 리브리에 후작님이셔."

그제야 에밀 또한 경계를 거두었다. 방금까지는 감히 제 누이의 집에 아침부터 쳐들어온 불한당을 보듯이 하더니, 리브리에 후작이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얼굴을 갈아엎고는 꼿꼿한 자세로 다가왔다.

"... 죄송합니다. 몰라뵈어 인사가 늦었습니다...! 에밀 리브리에라고 합니다...!"

에밀이 잔뜩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에 잘 긴장하지 않는 아이인데, 과할 정도로 굳어 보였다.그나저나, 지금 이 둘을 만나게 해도 될까.아무래도 둘의 목적이 같은 것 같은데.

"하하,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마리에트 씨와 이야기를 좀 나누기 위해 방문했는데, 뜻밖의 손님이 계셨군요."

마리에트는 이 상황이 불편했다.... 이 사람을 집으로 들여? 말어? 그렇다고 동생도 있는데 멋대로 축객령을 내렸다간 동생한테까지 악영향이 갈 수도 있지 않은가.

"... 들어오세요."

"그럼, 기꺼이."

리브리에 후작은 특유의 그 능글맞지만 산뜻한, 미소를 띠며 오두막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풍기던 머스크 향은 가을이 되자 조금 더 진하고 무거워진 것 같았다.가을바람과 함께 찾아온 불청객이 합석하자, 안 그래도 좁은 테이블이 꽤 북적거렸다.

"... 좀, 드세요. 입맛에 맞으실지는 모르겠지만."

라일은 부드럽게 웃었다. 동생이 있는 타이밍에 찾아오길 잘했군.동생에게는 껌뻑 죽는다더니, 정말로 꽤 부드러운 태도로 변하지 않았는가.라일은 우아하게 스푼을 들어 제 눈앞의 스튜를 한 스푼 떠먹었다.

"... 훌륭하군요."

제 칭찬에, 마리에트는 어깨를 으쓱하고, 옆에 앉은 마리에트의 남동생만 얼굴이 붉어지는 걸로 보아하니 음식은 동생 쪽이 준비했나 보군.괜히 입맛이 떨어진 라일이 조용히 스푼을 내려놓으며 슬쩍 마리에트에게 말을 걸었다.

"... 아직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으십니까?"

"... 아직은요."

마리에트의 옆에 조용히 앉아 있던 동생의 표정이 안 좋아지며 입술을 달싹이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로지에 백작이 동생에게 대신 설득을 하라고 보낸 모양이었다.

"... 어쩔 수 없지요. 급한 용무가 있어 오늘은 이만, 식사 시간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식."

라일이 우아하게 인사를 건네곤 오두막 밖을 나섰다.

"준비해 두라 일렀던 것들, 실행에 옮기도록."

오두막 밖에서 대기 중이던 사용인이 고개를 숙였다.좋은 말로는 회유가 되지 않는다면, 이제는 정말로 네 목에 목줄을 채울 시간이다.라일은 마차에 올라탔다. 일단,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남동생을 먼저 이용해 볼까. 아니지. 그건 너무 쉽고 재미가 없다.그는 머릿속으로 몇 명의 후보를 추려보았다.화방 주인, 서점 주인, 남동생...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의 곁에 친밀한 이들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그럼, 얘기가 쉽지.그가 비릿하게 웃었다.








12화: 루비 목걸이



"몸조심하고, 부모님께 내 안부는 전하지 말고. 알지?"

"... 누님이야말로 몸조심하시고, 끼니도 거르지 마시고..."

마리에트는 더 있다가는 잔소리가 끝이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황급히 에밀의 등을 떠밀었다.오랜만에 인기척으로 따뜻해졌던 오두막에 한기가 들어찼다.그녀는 벽난로에 장작을 넣고 불을 붙였다. 따뜻한 공기가 휘돌며 집 안에 온기가 돌았지만, 헛헛한 마음은 가시질 않았다.조금, 외로웠다.

*

마을이 시끌벅적했다. 필립이 좀 괜찮아졌나 보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나온 건데, 이상하게 떠들썩했다.필립의 화방 앞이었다.경비대가 와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마리에트는 화들짝 놀라 인파를 헤치고 화방 쪽으로 달려갔다.

"... 필립?"

"마리...!"

필립이 경비대에게 붙잡혀 끌려가고 있었다. 마리에트가 재빨리 경비대원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 하시는 거예요...! 필립이 대체 뭘 잘못했길래, 이렇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비키십시오. 이 자는 밀수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밀수? 밀수라니. 간도 작은 애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있나. 얘는 그럴 위인이 되지 못한단 말이야!

"그럴 리가요, 뭔가 오해가 있을 거예요...!"

"판단은 법관이 합니다. 집행에 방해가 되니 비키시라고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 마리...! 난 정말 아니야, 난... 나는..."

"알아, 필립. 네가 그랬을 리가...! 저기요, 어딜 끌고 가는 거예요!"

필립이 끌려갔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마치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필립이 그랬을 리도 없지만, 만일 억울하게 누명이라도 쓴 거라면... 그렇다면 필립은 저렇게 취급받아선 안됐다. 저렇게 모욕을 받아선 안 된다는 얘기였다.

"... 말도 안 돼. 필립이 밀수라니?"

주변에서 모두가 웅성거렸다. 필립이 정말 그런 짓을 한 거냐고. 마치 그 애를 의심하기라도 하듯이.화가 치밀었다. 마차 사고로 한참을 아팠던 애가, 무슨 밀수를 한단 말인가.마리에트는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때마침 그녀의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마리..."

"... 알리야, 별일 없겠죠?"

알리야였다. 그녀는 침울해진 마리에트의 어깨를 끌어당겨 품에 가두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 괜찮을 거야. 그래야만 하고. 필립이 그랬을 리가 없잖니."

그녀는 무언가 알고 있을까. 그 목소리엔 이유 모를 깊은 슬픔과 연민이 서려 있었다.마리에트는 생각 했다. 어떻게 해야 불쌍한 내 친구를 구해낼 수 있을까?

*

"지시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일단 임시로 구금해놓긴 했습니다만... 정식 재판에 넘기기엔 증거가 부족하여..."

"거기까지 갈 필요는 없겠지."

"그럼..."

"일단 가둬놔. 증거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구금해놓도록. 내가 말하기 전까지 풀려나지 못하게."

라일 리브리에는 서류를 넘기며 안경을 고쳐 썼다. 살짝 찡그린 미간과 묘하게 흐트러진 머리칼이 평소보단 조금 예민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 탓에 사용인들은 몸을 사리고 있었다.

"... 하, 끝도 없군. 수입 규제는 대체 언제 풀릴 건지."

"수도에서 한바탕 크게 난리가 났던 일이라..."

"쯧, 난로의 장작을 좀 빼는 게 좋겠군."

"... 예."

날씨가 추워졌다고 저택 난방을 좀 세게 했나, 좀 더운 것도 같고. 라일은 목 끝까지 조이고 있던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이놈의 수입 규제 탓에 영지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물론 그 덕에 영내의 모든 미술 재료를 리브리에 후작가에서 매입하고, 마리에트의 재료 수급을 방해하긴 했지만...

'... 별 효과는 없었지. 창고에 있는 재료들은 다시 풀어야겠군.'

생각할수록 희한한 여자였다. 미술 재료 수급도 막아, 제 동생을 통해 회유도 시도해... 나름대로 온건한 방법을 통해 압박을 해봐도 전혀 곁을 내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뭐, 상관없었다. 온건한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취할 생각이었으니.

"아, 그리고..."

라일이 안경을 내려놓으며 이야기했다.

"이른 시일내로 수도의 살롱에 전시회 예약을 잡아놓지."

*

작업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모든 게 의미 없이 느껴졌다. 그 애가 걱정됐다. 그 여리고, 착한 친구가 받았을 모멸감과 상처가 제 상처처럼 아파왔고, 보지 못한 몇 주 만에 핼쑥해진 그 애가 안쓰러웠다.사실, 정답은 알고 있었다.리브리에 후작에게 도움을 청하면, 그러면 되는 일이었다. 그 대가로 자신이 후원이든, 의뢰든 받아들인다면... 아마 기꺼이 자신을, 아니 필립을 도와주겠지.그리고 그럴 수만 있다면...기꺼이 자신의 자유를 일부분 포기해서라도 필립을 구하고 싶었다. 그 애의 자유를 지켜주고 싶었다.

"... 하아."

한숨이 나왔다. 이게 옳은 선택일까. 몇 번을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무얼 할 수 있겠는가. 법 앞에서 감히. 나에게는 그 아이를 구할 방법이 없다.비에 젖어 헤매고 있던 나를 발견하고 도와주던 그 아이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곳에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던 그 다정한 아이를. 나의 기쁨이 자신의 기쁨인 듯 함께 좋아해 주던 소중한 나의 친구를.마리에트는 자리에 앉았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하고, 머리를 풀었다가 묶기를 반복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신경질이 났다. 내가 스스로 족쇄를 차야 하나 고민하는 이 상황에, 조금은 짜증이 났다. 그리고 친구의 안위를 두고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에 또 한 번 환멸이 났다.마리에트는 앉은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결의에 찬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간 마리에트는 아무렇게나 올려묶었던 머리를 정돈하고, 먼지투성이 옷을 벗어 옷장 한구석에 처박혀있던 수수한 드레스 한 벌을 꺼내 입었다. 끔찍하도록 싫어했지만, 돈이 떨어지면 팔기 위해 보관 중이던 귀걸이와 목걸이도 꺼내 착용했다.마음 같아서야, 이런 허례허식 따위 벗어던지고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럼 후작가 근처에도 가까이 가지 못할 것 같았다.마리에트는 마을로 가, 마차에 올라탔다.

"후작가 앞으로 가주세요."

"아이고, 아가씨께서 수행인도 없이 혼자 후작가에는 어인 일로..."

나름 귀족처럼 꾸몄다고, 마부의 태도가 껄쩍지근했다. 마리에트는 콧방귀를 뀌었다. 속물 같으니라고.

"... 됐고, 빨리 출발해 주세요. 급한 일이라."

마리에트는 품속에서 3실링을 꺼내 마부에게 던져주었다. 그는 그제야 입을 다물고 말을 몰기 시작했다.달리는 마차 안에서 바라 본 벨리르의 가을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마리에트의 속은 타들어 가는데도. 내려앉은 맑은 햇빛이 야속했다. 구름 한 점 없이 파아란 하늘에는 새들이 자유로이 날고, 늘어선 나무의 단풍은 유려한데, 마리에트의 마음은 지옥에 있는 듯했다.마차가 멈춰 섰다.

"아이고, 도착했습니다. 아가씨."

마리에트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마차에서 내렸다. 후작가 저택의 경비원들이 수행인도 없이 혼자 찾아온 여자의 방문에 당황한듯, 눈을 꿈뻑거렸다.마리에트는 개의치 않고 넓은 보폭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후작님을 뵙고 싶은데요."

그제야 경비원들은 자세를 고쳐잡으며 목을 가다듬었다.

"큼, 큼... 어디서 오신 누구십니까. 후작님께선 약속 없이 찾아온 객과는..."

"마리에트 로지에. 후작님께서 하신 제안에 대한 답을 드리러 왔다고 전하세요."

*

"... 후작님, 로지에 영애가 찾아왔습니다. 제안에 대한 답을 하러 왔다고..."

집사의 보고를 전해 들은 라일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효과가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반응이 훨씬 빠르군.

"응접실로 모셔라."

라일은 머리를 정돈하고 단추를 다시 잠갔다. 완벽히 매무새를 다듬은 라일이 집사에게 이야기했다.

"차와 다과는 제일 귀한 것으로."

"예."

조금 들뜨는 것도 같았다. 평생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인데.그가 요즘 그랬다. 살면서 경험해 본 적 없는 감정들에 지배당하는 일이 잦았고,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그럼에도 불쾌감은 이전보단 덜 했다. 오히려 조금은 즐겁기도 했다.라일은 장갑을 착용하며 응접실로 향했다. 복도에 걸려있는 액자가 묘하게 비뚤어져 있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저 제 뒤를 따라오는 집사에게 고쳐놓으라 일렀을 뿐이었다. 이 정도는 눈감아줄 만했다. 너른 아량으로.응접실의 문을 열자, 그 여자가 있었다.평소와는 다소... 다른 모습을 한. 항상 대충 올려 묶고 있던 머리를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파인 넥라인 위로 걸쳐진 작은 루비 목걸이가 반짝였다.

"...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영애."

제가 조심스레 입을 열자, 그녀가 고개를 돌린다.그녀와 눈이 마주친다. 짙은 녹음을, 벨리르의 여름과 숲을 닮은 그 눈동자가, 자신을 향한다.

"아니요.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 눈동자를 마주한 라일은 생각했다.

가지고 싶다고.






13화: 거래 성사


"... 후작님?"

마리에트의 부름에 번뜩 정신이 돌아온 라일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맞은편에 앉았다.

"아, 죄송합니다. 평소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기에...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고 말았군요."

그녀가 피식 웃었다.

"... 듣기에는 좋은 말씀이군요.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왔는데도 환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마리에트는 평소와는 달리 격식을 차린 말투로 이야기했다. 마치 지금 이곳에 있는 건 강가의 작은 아틀리에를 운영하는 화가 마리에트가 아니라, 백작가의 영애 '마리에트 로지에'라는 듯이.라일은 그 미묘한 차이를 읽어내고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 역시 영리한 여자야.'

"별말씀을. 그나저나, 제 제안에 대한 생각이 바뀌셨나 봅니다. 영애께서 이렇게 직접 발걸음하시다니."

라일이 제 앞에 놓여있는 찻잔을 들어 향을 음미하며 이야기하자, 마리에트도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시곤 조용히 찻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 부끄럽게도, 그렇습니다."

"부끄럽다니요. 제겐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나 마찬가지이지요."

라일의 이야기에 마리에트는 눈을 들어 라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외람되오나... 후작님께서는, 왜 저를 후원하고자 하시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단순히 가십지에 떠도는 그 소문 하나 때문인가요? 저의 명예를 위해서?"

"그럴 리가요. 영애께서도 아시겠지만, 이 알티에라 제국에서 후원이라는 관계가 가지는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지요."

마리에트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렇기에 라일의 제안이 더더욱 쉬이 이해되지 않았고, 의아했다.시골에서 홀로 그림을 그리던 몰락 귀족의 영애에게? 리브리에의 이름과 명예를 안겨주겠다니. 그럼, 리브리에는 내게서 대체 무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저 또한 영애에게 원하는 것이 있고, 저는 영애의 명예를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그걸 위해 가장 적합한 거래 방법이 후원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마리에트는 귀족들의 저런 화법이 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빙빙 돌려서 자신의 진짜 바람을 꼭꼭 숨기려드는 화법이.마리에트가 올곧은 눈빛과 목소리로 라일에게 되물었다.

"제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신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후작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한미한 가문의 영애인 제가 가진 것이라면, 응당 후작님께서는 이미 가지고 계실 테니까요."

라일의 긴 손가락이 응접실 테이블 위로 토도독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소리가 조용한 적막을 흔들 때마다, 마리에트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렸다. 제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렵기라도 한가? 라일은 조금 즐겁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의 세계를 원합니다."

괘종시계가 울렸다. 괘종시계와 함께 들려오는 라일 리브리에의 목소리는, 자극적이고 또 끈적하게 귓가에 감겨왔다.

"당신이 그려내는 그 세계를, 제게 주십시오."

묵직하게 내려앉은 목소리와 머스크 향이 마리에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녀는 어깨를 넘어 흘러내린 머리칼을 조심스레 정리했다. 바깥의 찬 공기가 한 점도 들지 않는 탓일까, 공기가 후끈했다.이해하기 힘들었다.유명하고 잘나가는 화가들의 그림도 많이 봤을 사람이, 자신의 투박한 그림에서 대체 무엇을 봤길래 저렇게까지 구는 걸까.마리에트는 생각 했다. 그저 취향에 맞는 그림을 원하는 것이라고.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그녀가 아무리 사교계와 가깝게 지내는 편이 아니었다지만, 그렇다고 바보는 아니었다. 라일의 말이 단순히 그림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그는 자신을 욕망하고 있었다.안 그래도 불편한 자리가, 더더욱 불편해졌다. 허리를 조여오는 드레스가 답답했고 거슬렸다.

"제게 꽤 버거운 것을 원하시는군요."

"하지만 저는, 당신께 더 많은 것을 드릴 수 있습니다."

"제게 무엇을 안겨주실 수 있으신가요."

"무엇을 원하십니까, 진귀한 보석과 돈?"

라일의 짙은 남청색 눈동자가 욕망으로 이글거렸다.

"저와의 첫 만남은 잊으셨나 봅니다."

"그렇다면, 제국 최고의 명예와 유명세를 원하십니까."

"... 눈썰미가 영, 좋은 편은 아니신가 봅니다."

코웃음과 함께 돌아온 마리에트의 당돌한 대답에, 라일이 즐겁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그는 이 상황이 만족스러웠다. 제 손바닥 위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상황을 리드하고자 발버둥 치는 마리에트의 모습에, 흡족했다.

"제게 바라는 것이 명확하게 있으신가 보군요."

마리에트의 눈동자가 라일을 향했다.

"제 친구가 억울하게 잡혀갔습니다."

"... 억울하게, 말입니까."

의심스럽다는 듯한 라일의 목소리에, 마리에트는 울분이 치밀었지만, 조용히 숨을 고르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 밀수라더군요. 하지만, 후작님. 그는 마차 사고를 당해 몇 주간 집 밖으로 외출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마리에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착오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도 제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마리에트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남들이 보는 저는, 평민 여자니까요. 하지만 후작님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죠."

"제가 후작님께 바라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제 친구를, 구해주세요."

라일의 입꼬리가 묘하게 비틀렸다. 방금까진 퍽 즐거웠는데. 그녀의 입에서 다른 놈을 구해달라는 간청이 나오는 순간, 흥이 깨져버렸다.괜한 변덕이 부리고 싶어졌다.

"... 밀수에 연루된 자를, 구제해달라. 이 말씀입니까. 영애야말로 제게 버거운 것을 바라시는군요."

마리에트의 속눈썹이 살짝 떨리는 듯 했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그녀가 마시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꾸했다.

"이것조차 버거우시다면, 저는 후작님께 바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제게 제 세계를 달라 하셨지요."

고개를 든 마리에트가 여전히 올곧은 눈동자로 라일을 바라봤다.

"제 세계를 온전히 갖고 싶으시다면, 그리해주시길 바랍니다."

부탁이 아니었다. 네가 나를 갖고 싶다면, 너는 응당 그래야만 한다는 일종의 압박이었다.라일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분명 기뻐야 하는 순간이건만, 묘하게 기분이 더러웠다. 마리에트의 태도에 대한 유감은 아니었다.늘 이랬다. 마리에트와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뒤늦게 사춘기를 맞은 소년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스스로조차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다니는 것 같았다.

"... 이제 보니, 영애께서는 협상에 재능이 있으셨군요."

라일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제가 졌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자세히 이야기해 주십시오. 제가 도울 수 있는 만큼 돕도록 하지요."

*

일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처리됐다. 며칠을 지지부진하던 수사는 순식간에 물 흐르듯 진행됐고, 필립의 화방과 창고, 장부와 거래처까지 샅샅이 조사하고 나서야 필립이 밀수에 연관된 흔적이 없다는 결론이 났다.이렇게 쉬운 일이, 대체 왜 여태까지 결론 나지 않고 있던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 좋은 게 좋은 거라지만, 이건 좀..."

환멸이 났다. 세상이 평민에겐 더욱 차갑고, 날 서 있는 곳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직접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처음으로 가문을 버린 자기 행동에 의문을 품을 뻔했다.마리에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잡생각을 떨쳐냈다. 뭐가 중요하랴, 어찌 됐든 필립의 억울함은 해소됐고, 감옥에도 가지 않았으니 좋은 일이다.그 대가라면 대가로 리브리에 후작과 후원 관계를 맺기는 했지만, 그 또한 사실 자신에게 이로운 점이 더 많은 일이었고.

"필립!"

마리에트가 화방 앞에서 한숨을 내쉬며 유리창을 닦고 있는 필립에게 달려가며 손을 흔들었다.필립이 놀란 얼굴로 마리에트를 바라봤다.

"마리...!"

필립은 그 며칠 새에 꽤 고생했는지, 안색이 많이 안 좋아져 있었다.

'그럴 만도 하지, 마차 사고에 이어서 밀수 누명이라니.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야.'

"필립, 몸은 좀 괜찮아? 몇 번이고 병문안을 가고 싶었는데... 피터가 절대 안 된다지 뭐야."

"... 어, 어? 으응... 나는 괜찮아. 걱정해 줘서 고마워."

"... 괜찮은 거 맞아, 필립? 너 안색이..."

필립이 이상할 정도로 식은땀을 흘렸다. 마리에트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안부를 재차 물으며 손수건을 꺼내 그의 땀을 닦아주려 했지만...

"아, 아니라니까...!"

필립은 그런 마리에트의 손길을 뿌리쳤다.

"... 필립?"

"그... 그게...!"

겁에 질려 있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 미안해, 마리. 오늘은 이만 돌아가 줘."

필립이 헐레벌떡 화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마리에트는 당황스러웠다.대체 필립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14화: 취향


마리에트가 후원을 받아들인 후로, 라일은 틈만 나면 아틀리에에 찾아오곤 했다.별다른 일을 하진 않았다. 그저 마리에트에게 선물을 건네고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돌아가는 것이 전부였다.

"... 할 일이 없으세요?"

보다 못한 마리에트가 라일에게 대놓고 이런 소리를 할 정도였으니, 알만했다.

"... 나름 바쁩니다만."

물론 라일이 정말 할 일이 없어서 아틀리에에 찾아오는 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라일은 요즈음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원래라면 신경 쓰지 않았을 사교계 소식들을 수집하고, 또 틈이 나는 대로 가까운 곳에서 열리는 살롱에도 참여하는 등 바쁘다 못해 정신없는 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자주 오시는 것 같은데요?"

마리에트는 제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이가 자신의 후원자라는 사실은 어느새 잊고 있기라도 하듯, 툴툴거리며 핀잔을 주었다.물론 라일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지만 말이다.그들은 나란히 벨리르 강가를 걷고 있었다. 가을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칼이 눈가를 간지럽혔다.

"그저 당신의 작업을 지켜보고 싶어서 온 것인데, 불편하십니까."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불편하다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마리에트의 양 볼이 조금 붉었다. 어느새 내려앉은 노을빛을 받아서 그런 걸까.

"말씀하시는 걸로만 보아서는 제가 불편한 것처럼 행동하시진 않기에."

라일이 피식, 작게 소리 내 웃었다. 그는 품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마리에트에게 슬쩍 건넸다.

"이게 뭐죠?"

"음, 초대장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초대장이냐는 얘기죠."

마리에트는 도통 말이 통하질 않는다며 고개를 젓고는 봉투를 봉인하고 있던 실링 왁스를 확, 뜯어버렸다.

"... 전시회 초대장이네요. 그것도 제국 최고의 화가라는 로빈 블랙우드의 전시회."

"예, 힘들게 구했습니다."

마리에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말이라고 하세요? 그야 당연히...!"

그녀는 당장이라도 신나서 껑충 뛸 것처럼 굴더니, 돌연 정신이 돌아온 듯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 좋네요. 꽤 많이."

불어온 바람에 버드나무가 흔들려, 듣기 좋은 마찰음을 냈다. 따뜻한 빛 아래에서 색이 옅어지는 마리에트의 머리칼이 버들잎과 함께 흩날렸다. 그녀는 애써 정돈한 머리가 다시 헝클어지자, 아예 포기라도 한 건지 묶고 있던 머리를 풀어 헤쳤다.

"... 내일, 모시러 오겠습니다. 수도까지 가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테지요. 짐은 많이 챙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꼭 필요한 것만 몇 가지 챙겨두시지요."

마리에트는 기분이 좋아졌다. 새로운 재료를 발견했을 때만큼이나. 방금까진 좀 짜증 나던 가을바람조차 달가웠다.

"돌아갈까요. 바람이 차갑습니다."

"... 네."

꼴 보기 싫었던 리브리에 후작의 얼굴도, 지금 보니... 뭐 볼만한 것도 같고.아틀리에로 돌아가는 길은 유난히도 짧았다. 같은 거리를 걸어왔을 터인데, 기분이 들떠 발걸음이 가벼워진 탓일까.

"... 조심히 가세요. 그리고..."

말과 말 사이의 아주 짧은 정적을, 바람 소리가 채워주었다.마리에트는 민망한 듯 고개를 숙이며 이야기했다.

"감사해요. 신경 써주셔서."

그 모습을 본 라일의 눈동자에 약간의 놀라움이 서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리에트는 오히려 더 민망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이 정도 감사 표시도 하지 않을 사람으로 보였나?

"별말씀을. 내일은 하루가 길 테니, 일찍 쉬십시오."

*

"... 잠을 설치셨나 봅니다."

그 말대로였다. 마리에트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데뷔탕트 이후로는 수도에 가본 적도 없을뿐더러,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화가의 전시를 직접 볼 수 있다니.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금요. 많이 티 나나요?"

마리에트는 머리를 땋아 내리고, 적당히 가벼운 드레스에 숄을 걸친 차림으로 라일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 올라탔다.이렇게 이른 시일 내에 또다시 드레스를 입게 될 줄이야. 마리에트는 퍽 불편한 감각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들뜬 마음에 입꼬리를 내릴 수가 없었다. 그 탓에 꽤 괴상한 표정이 되기는 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라일의 시선이 그녀의 목덜미를 향했다.

"오늘은 액세서리를 착용하지 않으셨군요."

"가지고 있는 장신구라곤 저번에 보셨던 그 루비 목걸이뿐이라."

"그렇다면 제게는 다행이군요."

리브리에 후작이 품속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진홍색의 벨벳 소재로 된, 아주 고급스러운 상자였다.그는 마리에트를 향해 상자를 건넸다.마리에트는 의심의 눈초리로 라일을 바라보며 상자를 받아서 들었다.대화 흐름상, 액세서리인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이걸 왜 나한테? 이래도 되나? 리브리에 후작은 약혼자도 있을 텐데.

"... 이게 뭐죠?"

"열어보십시오."

마리에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상자를 열었다. 부담스럽고, 불편했다. 하지만 거절할 명분도 마땅치 않았다.목걸이였다.섬세하게 세공된 프레임 위에 자신의 눈동자를 닮은 에메랄드가 박혀있는 것이었는데, 한눈에 봐도 보통 값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드는 물건이었다.

"... 이건."

"제 마음이라고 하면, 부담스러우실 테니. 그저 저희의 관계 지속을 위한 뇌물 정도로 해두지요."

"그런다고 불편하지 않을 것 같으세요?"

"그러시길 바랍니다. 제 욕심일까요?"

"욕심이 과하시네요. 이런 걸 받고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사람에게나 주셨으면 좋았을 것을요."

"그런 사람에게 주는 것보다야, 영애에게 드리는 편이 훨씬 가치 있고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 어쨌든, 제게는 과분한 물건입니다."

마리에트가 상자를 도로 닫으려 하자, 라일이 조용히 손가락을 들이밀어 상자를 닫지 못하게 막았다.그리곤 군더더기 없는 손놀림으로 상자를 도로 가져가더니,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이것까지는 봐주시지요. 그 초대장, 꽤나 어렵게 구해왔는데."

이러면... 더 거절하기 난감해지는데. 마리에트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마리에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고 라일을 향해 등을 돌렸다.살갗 위로 미약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 열기가 닿아오는 곳이 간지러웠다. 목걸이 줄이 목덜미에 닿아오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또 한 번 살갗을 간지럽혔다.

"됐습니다."

"... 감사해요. 번번히."

"하나하나 인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앞으로 더 많은 걸 받게 되실 테니."

그 말을 하는 리브리에 후작의 얼굴이 묘하게 서늘하고 소름 끼쳐서, 마리에트는 애써 외면하고 싶어졌다.수도로 가는 길은 멀었고, 그 길을 가는 내내 불편했다. 마차 안에는 어색한 공기가 가득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마부가 속도를 늦췄다.

"도착했군요."

마차의 문이 열리고, 한기가 몸을 휘감았다. 수도의 공기는 뭔가 달라도 달랐다. 뭐라고 할까, 조금 더 차가웠고 건조한 듯했다.라일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린 마리에트가 주위를 둘러봤다.

'... 리브리에 후작령이랑 그렇게 크게 다르지도 않네.'

너무 기대한 탓일까.수도의 전경은 생각보단... 그저 그랬다. 리브리에 후작령도 몹시 화려했고, 아름다웠기 때문인지, 별 감흥이 느껴지진 않았다. 단지 사람이 좀 더 많다는 것?특이점을 찾자면, 눈앞의 거대하고 화려한 저택 정도였다.

"들어가시죠."

"... 여기요?"

"예, 이번에 수도에 저택 하나를 마련했습니다. 당분간 머물러야 하는데, 호텔에 묵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대체 돈이 얼마나 많은 걸까.그러니까 지금, 저택이 무려 두 채라는 거지? 리브리에 후작령이랑 수도에 각각?

"... 집을, 사신 거예요? 지금, 이 일정 때문에?"

"예, 그렇습니다만."

마리에트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이런 사람이 목걸이 하나 샀다고 지갑 사정에 얼마나 타격이 있겠어. 그녀는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목걸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의미 부여하지 말자.그래, 그냥 자신이 후원하는 예술가가 귀족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변변한 장신구 하나 없이 있는 꼴을 보기 싫었을 뿐이겠지.마리에트는 라일을 따라 저택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완벽하게 정돈된 정원수들과, 화려하게 꾸며진 인공 연못... 얼마전에 구매했다더니 언제 이렇게 꾸며놓은 건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 숨막혀.'

그 틀에 맞춘 듯한 정원을 보고 있자니, 숨이 턱 막혀왔다.뭐 하나 자연스러운 게 없었다.분명 자연물들로 가득한데도, 모든 것이 인공적이었다. 그리고 그 완벽하게 꾸며진 정원을 거니는 라일 리브리에는, 이런 풍경들이 너무도 익숙해보였다.

"... 정원이, 멋지네요."

마리에트는 으레 귀족들이라면 할 법한 입에 발린 소리를 내뱉었다. 그 말에 라일은 피식 웃었다.

"예, 꽤 공을 들였습니다. 수도의 귀족들은 이런 걸 좋아한다기에."

"뭐, 수도가 아니어도, 귀족들은 이런 걸 좋아하죠. 보통은."

"영애는 어떻습니까."

"... 저요?""예. 영애는 이런 풍경을 좋아하십니까?"

그리 묻는 라일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더 끈적하게 들렸다.

"...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니요."

마리에트가 조금 민망한 듯 웃으며 이야기했다.

"사실... 저는 아무리 예쁘게 꾸며진 정원을 봐도 느껴지는 게 없더라고요. 전 그냥 숲이 좋아요. 꾸며지지 않은 숲이요."

그 이야기를 들은 라일이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저 또한 그렇습니다."

"당신을 만난 후로, 저도 그런 풍경들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저렇게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15화: 심판의 천사



수도에서의 첫날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마차를 타고 오며 쌓인 여독을 풀고, 넓다 못해 광활하게까지 느껴지는 저택을 구경하고, 저녁 식사를 한 것뿐인데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으으, 피곤해."

마리에트는 자신에게 주어진 손님 방 침대에 몸을 던졌다. 돈이 좋긴 좋나보다. 이렇게 풀썩 뛰어들어도 흔들림이 없네. 마리에트는 이 방에 들어간 돈이 얼마일까, 생각했다.

"하기야, 며칠 머문답시고 저택 하나를 통째로 사들이는 사람한테 그런 게 의미 있을 리가."

마리에트는 자기 목에 걸려있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돈이 썩어나는 리브리에 후작이라지만... 그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알게 된 이상, 이런 고가의 선물을 받고도 아무렇지 않기는 힘든 일이었다.마리에트는 다시 몸을 일으켜 화장대 앞으로 움직였다. 평소엔 하지도 않는 치장을 했더니, 영 불편하고 뻐근했다.리브리에 후작이 메이드를 붙여주겠다고 했지만, 남의 시중을 받는 게 썩 몸에 익지를 않은 탓에 거절했건만... 막상 이 거추장스러운 옷을 혼자 벗을 생각을 하니 조금 막막했다.그렇게 혼자 꾸역꾸역 불편한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몸을 씻고, 가벼운 홈드레스로 갈아입자 이제야 살 것 같았다.오늘은 그래도 잠을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이 피로하니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솔솔 오기 시작했다.마리에트는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했다.

'... 즐거운 하루가 되기를.'

*

아침이 유독 빠르게 찾아왔다.살짝 걷힌 커튼 사이로 쏟아진 햇살이 마리에트의 뺨을 간지럽혔다. 그녀는 눈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저택의 하녀장이 방문을 두드렸다.

"영애, 기침하실 시간입니다."

마리에트가 숄을 걸치곤 문을 열어 하녀장을 맞이했다.

"아, 깨어계셨군요. 잠자리는 좀 편안하셨나요?"

"네, 덕분에요."

하녀장은 불편해하시는 걸 알지만, 후작의 특별 지시로 치장을 돕기 위해 왔다며 양해를 구해왔다.평소라면 극구 사양했겠지만, 이번만큼은 마리에트도 쉬이 수긍하고 그녀와 메이드들을 방에 들였다.아무래도 공식적인 리브리에 후작가의 후원을 받는 예술가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건데, 추레하게 나타날 수는 없으니까.그렇게 몇 분, 아니 몇십 분? 아니, 몇시간일지도 모르겠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메이드들과 하녀장에게 붙잡혀 인형처럼 치장 당하고 나니, 아침부터 체력이 쏙 빠지고 말았다.

"끝났습니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하녀장이 진땀을 빼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말마따나 거울에 비친 마리에트의 모습은...

'... 봐줄 만하네.'

꽤 괜찮았다. 땋은 머리를 틀어 올린 번 헤어와, 어깨를 드러낸 남청색 드레스, 그리고 어제 선물 받은 에메랄드 목걸이까지.누가 봐도 귀족 영애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물론 마리에트는 이 거추장스러운 차림이 썩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고생해 준 이들을 생각해서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아침부터 정말 수고하셨어요. 마음에 들어요."

"어머, 마음씨도 고우셔라."

하녀장과 메이드들이 인사를 건네고 방을 떠나자, 이번에는 집사장이 찾아왔다.

"주인님께서 만남을 청하십니다."

마리에트는 고개를 끄덕이곤 집사장의 안내를 따라 응접실로 이동했다. 저택의 복도에는 온갖 값비싼 장식품들과 예술품들이 늘어서 있었고,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하게 청소되어 있었다.그녀는 자신의 먼지투성이 오두막을 떠올리며 괜히 손가락을 들어 창틀을 슥 쓸어보기도 했다. 손가락에 묻어 나오는 게 하나도 없는 걸 보니, 이 저택의 사용인들은 엄청나게 고생하겠구나.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긴 복도를 지나자, 마찬가지로 돈을 들이부은 듯한 가구들로 가득한 응접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오셨습니까. 간밤에는 평안하셨는지요."

"네. 사용인분들이 친절하시더군요."

긴 다리를 꼬고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던 리브리에 후작이 마리에트를 발견하자, 다리를 풀고 우아하게 몸을 일으켜 인사를 건넸다.저도 나름 꾸몄다고 생각했는데, 평소보다 한층 더 멀끔하게 차려입은 리브리에 후작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차림새였지만, 오늘따라 군청색 머리칼은 더 윤기가 흘렀고, 정장은 몸 라인이 예쁘게 드러나는 딱 맞는 핏이었다. 그의 왼쪽 가슴팍에는 자신이 착용한 목걸이와 유사한 디자인의 에메랄드 브로치가 달려있었다.

'더럽게 잘 생겼네.'

그에게서 평소의 머스크 향과는 다른, 우드 계열 향이 물씬 풍겨왔다. 묵직하게 내려앉은 향기와 대조되는 날렵한 생김새가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드레스가 잘 어울리십니다. 고심하여 고른 보람이 있군요."

"... 직접 고르신 건가요?"

그는 당연한 걸 뭘 묻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에트는 속으로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요즘 매번 느끼는 거지만, 그의 호의가 퍽 부담스러웠다. 더군다나 그가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정체 모를 욕망을 눈치챈 후로는, 그 부담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영광이네요.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시다니."

"처음으로 예술가로서의 영애를 소개하는 자리인데, 제가 하나하나 신경 쓰는 게 당연합니다."

그렇게 잠깐의 불편한 티타임 후에, 라일과 마리에트는 저택을 나섰다. 전시회가 열리는 살롱과 저택의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데도 굳이 마차를 타자는 라일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등장하는 순간까지도 정치적인 메시지라며 마차를 타는 것을 고집하는 라일 탓에 마리에트도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사실 귀족으로 살면서도 잘 이해가 되진 않았던 부분이지만, 귀족들은 이상하리만치 남들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그렇게 아주 짧은 거리를 마차로 이동한 뒤, 굳이 에스코트까지 해주는 라일을 따라 살롱 안으로 들어갔다.살롱 안에는 이미 꽤 많은 사람이 와있었다. 대부분은 남자였고, 몇 없는 여자들은 지위가 꽤 높은 귀부인들로 보였다. 마리에트 또래의 영애들은 거의 없는 듯했다.살롱 안의 이들이 라일과 마리에트를 바라봤다. 리브리에 후작과 그가 후원하는 여류 작가. 사교계를 휩쓸었던 소문의 당사자들이 등장하자 장내가 술렁였다.

"... 저 영애가?""귀족일까요?"마리에트의 몸이 살짝 떨렸다. 표정은 평온했지만, 귀족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적잖게 스트레스를 받는 듯 했다.라일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작게 이야기했다.

"신경 쓰이십니까."

"... 안 그럴 수 있나요."

그녀는 크게 한 번 숨을 들이마시곤,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제가 잘못한 건 없으니까요. 당당해야죠."

그녀는 이내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저 그림이 제일 보고 싶었다며 잰걸음으로 전시 공간으로 다가갔다.그러나 라일이 보기에, 지금의 마리에트는 꽤 위태로운 상태였다.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속이 쓰려왔지만, 나쁘지만은 않은 상황이었다.낯선 이들의 호기심과 적의 사이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라일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그림을 보고 있는 마리에트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 그림이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그야, 로빈 블랙우드가 그려내는 자연은 정말 아름답잖아요. 이 빛 표현, 질감, 살아있는 듯한 인물들의 표정..."

그녀는 방금까지의 위태롭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그림에 빠져들어 있었다.그렇게 한참이나 그림을 감상하고 있던 찰나, 누군가 마리에트와 라일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이네요, 리브리에 후작님."

종달새가 지저귀는 것 같은 간드러진 목소리, 찰랑이는 백금발, 푸른 하늘을 닮은 청명한 눈동자, 그리고 눈동자를 닮은 산뜻한 푸른 색의 드레스 차림을 한 귀족 영애였다.

"... 데레스테 영애."

"답신이 없으시기에,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걱정했건만... 다행히 별 일은 없으신가 봅니다."

그녀가 라일에게 산뜻한 목소리로 뼈 있는 말을 건넸다.

"이런, 편지가 누락되었나봅니다."

라일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능글맞게 대꾸했다. 그 말을 들은 여자, 데레스테 영애는 어깨를 으쓱하곤 고개를 저었다.

"정말, 저도 곤란합니다. 매번 아버지께서 후작님과는 어떠냐고 물어오실 때마다, 마땅히 드릴 대답이 없으니..."

그녀는 그런 라일의 모습을 보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는 곁에 멀뚱히 서 있던 마리에트를 향해 반갑게 말을 건넸다.

"아, 정말 뵙고 싶었답니다. 마리에트 로지에 영애, 맞지요?"

"아, 네... 맞습니다만, 제 이름은 어떻게..."

마리에트는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그녀가 경계 된다는 듯, 살짝 굳어진 표정으로 어색하게 인사를 받으며 대꾸했다.

"어머, 죄송해라. 실례했네요. 제가 캐낸 건 아닌데... 주변에서 후작님과의 그... 소문 탓에 하도 성화라서요. 어쩌다 보니 알게 됐는데, 저도 모르게 아는 체를 해버렸네요. 불편하셨을까요?"

"... 아닙니다. 그저 제 이름을 아시는 것이 의아했을 뿐이에요. 반갑습니다. 마리에트 로지에라고 합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릴게요. 너무 반가운 나머지... 저는 라일라 데레스테라고 해요."

그녀가 말갛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리브리에 후작님의 약혼자랍니다."

그 말에 쿵, 마리에트의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왜일까. 자신과 리브리에 후작은 아무런 사이도 아닌데, 왜 이토록 마음이 불편할까. 마치 죄를 지은 것처럼.마음 한구석이 따끔거렸고, 손과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눈앞의 아름다운 영애가, 마치 자신을 심판하러 온 천사처럼 보였다.







16화: 황태자



마리에트는 마치 가시로 만든 방석 위에 앉은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우연히 만난 라일 리브리에의 약혼자, 라일라 데레스테 영애의 권유로 함께 수도의 유명한 디저트 가게에 오게 되었는데... 묘하게 흐르는 이 정적과 자신을 유심히 살펴보는 데레스테 영애의 눈빛이 너무 불편했다.잘그락, 찻잔이 컵 받침과 부딪히는 소리가 정적을 흔들었다.

"... 제가 불편하시죠?"

데레스테 영애가 어색하게 웃으며 마리에트에게 말을 건넸다. 영애의 그 머쓱한 미소에 꽤 많은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 아닙니다. 제가 여행의 여독이 아직 풀리지 않아, 표정이 좋지 않았나봅니다."

마리에트는 애써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 불편했다. 자신에게 알 수 없는 욕망을 가진 리브리에 후작의 약혼자와 독대하고 있는 이 순간이. 아니, 오로지 그것 때문일까? 입안이 썼다.

"저런, 제가 피곤하신 분을 붙잡았군요. 죄송해요. 너무 반가운 나머지..."

"아, 영애가 사과하실 일은 아니에요. 귀한 분을 앞에 두고 피곤한 티를 숨기지 못한 저의 실수이지요."

"... 어머, 그런 의도로 얘기한 건 아니었는데 말이죠."

데레스테 영애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찻잔의 손잡이를 쥐었다.

"제가 불편하실 만하죠. 아무래도 얼마 전에 돌았던 소문도 있고..."

그녀가 마치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저와 리브리에 후작님은 약혼 관계이긴 하지만, 가문 간의 정치적 판단으로 이어져 있을 뿐이거든요."

그거야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리브리에 후작에게 연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 하지만, 그 스캔들로 인해 리브리에와 데레스테 가문 간의 정치적인 약속에 흠이 생긴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귀족 간의 약혼과 혼인은, 그런 것이었다. 정치적 입지와 가문의 경제력, 그 모든 것을 재고 따져서 이행하는 계약 같은 것.그렇기에 상대방의 스캔들로 인해 흔들리는 정치적 입지와 여론에 의해서 타격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그리고 마리에트는 정확히 그 지점을 걱정하고 있었다. 리브리에 후작가 정도 되는 가문과 약혼할 정도라면, 그런 스캔들 하나하나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을 테니까.

"어머, 배려심이 깊으시네요. 하지만 영애, 정말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자, 잘그락하는 소리가 났다.

"저는 제 가문이 싫거든요. 파혼당하거나, 평판이 안 좋아지는 것 따위는 제게 중요하지 않아요."

"... 네?"

저렇게 완벽하게 귀족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자신의 가문을 싫어한다니. 의외의 발언이었다.

"사실, 그래서 영애를 꼭 만나보고 싶었어요."

데레스테 영애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마리에트는 조금 부담스러워져, 그녀의 눈을 피하고자 찻잔을 들었다.

"... 제가 가문을 떠났기 때문인가요?"

"음, 물론 그런 이유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좀 더..."

데레스테 영애가 말끝을 흐렸다. 마리에트는 조용히 차 한 모금을 마시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마주 봤다.그녀는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영애가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부러웠거든요. 단순히 가문을 떠난 걸 넘어서, 진짜 자신을 찾은 것 같은 그 모습이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데레스테 영애의 얼굴이, 정말로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맑고 아름다워서, 마리에트는 저도 모르게 마주 웃었다.

"... 과찬이세요."

그녀와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제가 전시회를 한다구요? 그때 그 살롱에서요?"

마리에트는 방금까지 먹은 음식을 쏟아낼 것만 같았다. 지금 후작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예, 이미 대관 일정을 잡아두었습니다."

"아니, 저랑 상의도 없이...!"

"영애께서 신경 쓰실 것은 없습니다. 그림은 사용인을 시켜 아틀리에에서 옮겨올 것이고, 기획과 배치 계획도 이미 다 정해두었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마리에트는 무어라 이야기하려다, 그냥 고개를 저으며 입을 닫아버렸다. 그럼 그렇지. 후원 제안을 받아들일 때부터 각오했던 일 아닌가.후원자가 원한다면, 기꺼이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 했다.

'하지만, 내 이름을 걸고 하는 전시회를 나랑 상의도 없이...!'

물론 그렇다고 분이 풀리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마리에트는 입맛이 떨어져서, 식기를 내려놓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속이 좋지 않네요. 저는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마리에트는 거추장스러운 드레스 자락을 걷어차며 큰 보폭으로 걸어 방으로 돌아갔다. 적어도 상의 정도는 할 수 있었잖아. 자신의 의사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한 후작의 태도에 속이 상했다.한편, 라일은 잔뜩 성이 난 마리에트가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화가의 전시회가 열렸던 제국 최고의 살롱에서 전시회를 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데, 왜 화가 난거지?

"... 식사는 여기까지 하지."

라일은 상을 물리고 집무실로 발을 옮겼다. 가슴 한구석이 불편했다. 그 작은 여자가 화를 내는 것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서.

라일은 시끄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자신의 앞으로 온 편지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대부분은 수도에 방문한 리브리에 후작을 만나 친분을 쌓고자 하는 이들이 보내온 초대장이었고, 개중 몇 개는 신진 작가 마리에트와 그 후원자인 라일과의 교류를 청하는 편지들이었다.

라일은 마리에트와 관련된 편지들만을 골라내고 나머지는 벽난로에 던져버렸다.

부러 시간을 내어 수도에 왔으니, 마리에트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밑 작업을 착실히 해놓을 생각이었다.

라일은 집무실 탁상 위의 종을 울려서 집사를 불러냈다.

"영애와 갈 곳이 있다. 채비하도록."

*

마리에트는 숨이 막혀왔다. 물리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이 답답해 죽을 것 같은 드레스를 입은 것만으로도 숨쉬기가 힘든데, 귀족들이 모인 교류회에 참석까지 해야 한다니.마차에서 내려서 사용인의 안내를 받아서 모임 장소까지 이동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 부담스러우시다면, 가만히 계셔도 됩니다."

"제가 말실수라도 할까 봐 걱정되시나요?"

"그건..."

라일은 잠시 말을 흐렸다. 아무래도 그것도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아닙니다. 그저 영애가 불편하실까 싶어."

마리에트는 코웃음을 치며 작게 대꾸했다.

"그걸 알면서 이런 데 끌고 오시다니, 참 다정하십니다."

그녀는 구시렁거리며 사용인의 안내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발걸음을 옮길수록 무언가, 심상치 않음이 느껴졌다. 과할 정도로 화려하게 꾸며진 정원... 군데군데 배치된 경비대원들...

"... 여기 혹시..."

"별궁입니다."

... 빨리도 말해주는군.

마리에트의 걸음걸이가 묘하게 불편해졌다. 갑자기 황궁의 별궁으로 끌고 오다니, 당장이라도 라일의 멱살을 부여잡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넓고 화려한 별궁의 정원을 한참 동안 걷고 나서야, 인공 호수 옆에 위치한 유리로 만들어진 돔 모양의 온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온실 안은 말 그대로 굉장했다.사계절을 가리지 않고 피어있는 형형색색의 꽃들과, 온실 안에서 지저귀는 작고 어여쁜 관상조들. 그리고 그 한 가운데에 마련된 티 테이블까지.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한 풍경이었지만, 마리에트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

새들은 날개깃이 잘려 먼 거리를 날지 못하고 주저앉았고, 계절에 맞지 않게 피어난 꽃들은 묘한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한 마리에트가, 라일의 뒤를 따라 티 테이블을 향해 다가갔다. 그곳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던 이들이 대화를 멈추고 이쪽을 바라봤다.

"아, 오셨군요. 리브리에 후작."

밀색 머리를 가진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리브리에 후작을 반겼다.

뭐라고 해야 할까. 라일과는 조금 다른 결이었지만, 그 역시도 뼛속까지 고귀한 사람이라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다정하고 온화한 미소로 리브리에 후작과 악수를 나누곤, 그 뒤에 서있던 마리에트에게 인사를 건넸다.

"루시안 엘리아노르라고 합니다."

잠시만, 엘리아노르?엘리아노르라면...

'황족이잖아...! 그럼 이 사람이...!'

"...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17화: 향수병



마리에트의 인사를 받은 황태자, 루시안 엘리아노르가 난감하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벼운 자리니까요."

"가벼운 자리라 할지라도, 황태자 전하와의 만남마저 가벼운 것은 아니지요."

마리에트는 답지 않게 예법을 지키며 대답했다.물론 황족이 대단히 무섭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지금 이 자리는 리브리에 후작의 후원을 받는 작가로서 참석한 자리이니만큼, 후작의 체면을 위한 행동이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는 라일의 입꼬리가 묘하게 비틀렸다.그녀는 분명 기특한 행동을 하고 있는데, 그녀가 다른 이에게 굽신거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심기가 뒤틀렸다.

"일단, 앉으시지요."

황태자의 에스코트를 받는 날이 다 오다니, 마리에트는 당장이라도 혀를 씹어버리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목걸이가 목을 죄어오는 것 같아 답답했다. 당장이라도 손으로 잡아 뜯어버리고 싶은데, 차마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 답답했다.

"그나저나, 정말 의외로군요. 리브리에 후작님께서 이런 자리에 다 참석하시다니."

"약혼자의 초대를 무시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리브리에 후작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제야 황태자 옆자리에 앉아있는 데레스테 영애가 눈에 들어왔다.마리에트와 눈이 마주친 데레스테 영애가 그 큰 눈을 반으로 접어가며 예쁘게 웃어 보였다.

"와줘서 고마워요... 마리에트양."

그녀는 무언가 목 너머로 올라오는 말을 되삼키듯 잠시 침묵하다가 골라낸 말을 뱉어냈다.

"... 별말씀을요. 저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데레스테 영애."

마리에트는 그녀가 말을 고르던 이유를 알 것 같아서, 머쓱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그리고선 맞은편에 앉은 황태자를 향해 이야기했다.

"... 소개가 늦었습니다. 마리에트... 로지에라고 합니다."

마리에트의 소개에 라일의 입꼬리는 흥미롭다는 듯 올라갔고, 데레스테 영애의 눈을 동그랗게 커졌다.

"아, 로지에 백작가의 영애셨군요. 로지에 백작께서는 잘 지내십니까."

"황제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 덕에, 늘 잘 지내십니다."

그 말에 라일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잘 지낸다고? 그 로지에 백작이? 당장 어제도 어떻게 알았는지 수도의 저택 앞까지 찾아온 것을 어르고 달래 돌려보내느라 진땀을 뺐건만.뭐라더라, 제 아들 덕에 후원 제의를 받아들인 것이 분명하니 그 공을 높이 사, 뭐라도 해주셔야 하지 않겠냐고? 정말 지긋지긋한 인간이었다.

"그보다 두 분께서는 어떻게 인연이 닿으셨습니까."

"아, 그게..."

마리에트가 말을 고르며 망설이자, 옆에 앉아 있던 라일이 툭 끼어들었다.

"제가 영애의 작품을 보고 한눈에 반했습니다."

마리에트는 당장이라도 저 뺀질거리는 면상에 주먹을 한 대 꽂아 넣고 싶어졌다.바로 앞에 제 약혼자가 앉아 있는데, 아무리 감정 없는 약혼이고, 데레스테 영애가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지만, 황태자와 약혼자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굳이 저런 소릴 하냔 말이다.

"... 하하, 칭찬이 과하십니다. 후작님."

마리에트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그를 자중시키려 애썼다.적어도 이런 자리에서 제 약혼자를 앞에 두고 다른 여인을 추어올린답시고 저런... 해석의 여지가 있는 소리를 하는 건 아무래도 예의가 아니었다.

"과하다니요. 제 진심입니다. 우연히 선물 받은 영애의 그림을 보고 반해서 직접 아틀리에까지 찾아가기까지 했습니다."

"그거참, 뜻밖의 전개로군요."

황태자가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분명 온화한 인상인데도, 그 순간만큼은 꽤 비릿하게 보였다. 그는 왠지 모르게 리브리에 후작에게 묘하게 적대적으로 보였다. 둘이 무슨 관계가 있나?

"그럴 만하죠. 마리에트 양의 그림은 정말, 아름답거든요."

그 옆에 가만히 앉아 차를 마시던 데레스테 영애가 한마디를 거들었다.마리에트는 그 와중에도 자신을 로지에 영애가 아닌 마리에트 양이라고 부르는 데레스테 영애를 바라보며 웃었다.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저도 꼭 보고 싶네요. 로지에 영애의 그림."

황태자의 읊조림에 대답한 건 라일이었다.

"얼마 뒤에 전시회가 있을 겁니다."

그는 길고 곧은 손가락을 티 테이블 위로 두드리며 부드럽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초대드리지요."

*

정신이 없다 못해, 몸이 세 개라도 부족할 것 같은 하루하루가 지나갔다.아무리 기획도 준비도 리브리에 후작가에서 다 한다지만, 적어도 제 이름을 걸고, 수도에서 하는 전시회를 그저 팔짱 끼고 지켜만 볼 수는 없었다.그려놓은 그림 중에 퀄리티가 좀 떨어지는 것들은 걸러내고, 전체적인 결에 맞춰 새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평소에 그리던 것들과는 조금 다른 걸 그려야 했다. 수도의 귀족들은 그런 걸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영애, 요새 좀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 저랑 상의도 없이 일정을 잡으신 누구 덕분에요."

"그건..."

마리에트는 듣기 싫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라일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작업 중인 그림이 썩 마음에 들질 않아 신경질이 나있는데, 옆에서 계속 얼쩡거리는 게 거슬렸다.라일은 어깨를 으쓱하곤 군말 없이 작업실을 떠났다.아니, 그랬다고 생각했다. 별안간 들이닥친 하녀장을 마주치기 전까지는.

"아니, 엠마 부인?"

"후작님께서 영애의 채비를 도우라고 하셨답니다."

"갑자기 무슨 채비를...?"

"그건 저야 모르지요."

그렇게 하녀장 엠마 부인의 손에 이끌려 이리저리 치장 당하고 나니, 기다렸다는 듯 라일이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예."

어차피 들어올 거면서 질문은 왜 하는 거야, 마리에트는 잔뜩 짜증이 난 상태로 그러라고 대꾸했다.문을 열고 들어온 라일이 멋들어지게 인사를 하곤 한쪽 팔을 내밀었다.에스코트할 테니, 잡으라는 거겠지. 마리에트는 떨떠름했지만 일단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꼴값은...'

어딜 또 끌고 가려고 이렇게 부산스럽게 구는 건지, 벌써 피곤해졌다.요즈음 리브리에 후작이 온갖 티파티며 사교 행사에 끌고 다닌 탓에 마리에트는 피로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쌓여있었다.피곤했다.진심을 숨기고 돌려서 말하는 거지 같은 화법들도, 자연스러운 구석 하나 없이 인공적으로 꾸며진 정원들도.물론 데레스테 영애 같은 좋은 친구도 사귀었지만, 그녀를 만나면서도 돌덩이 하나가 치워지지 않고 매 순간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벨리르로 돌아가고 싶었다.아침이 되면 지저귀는 새 소리를 들으며 눈을 뜨고, 숲에서 과일을 따다 잼을 만들고, 알리야와 수다를 떨고, 필립의 가게를 구경하던 그 소박한 일상이 그리웠다.끼니마다 차려지는 호화로운 음식이나, 화려하게 꾸며진 자신의 모습보다는, 그런 작고 소박한 풍경들이 더 좋았다.그런 생각에 잠긴 마리에트의 표정을 읽기라도 한 건지, 라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많이 지치십니까."

마리에트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눈치를 주거나, 핀잔을 주려는 의도는 없는 듯했다. 정말 걱정돼서 하는 얘기처럼 보였다.

"... 사실은, 네. 조금요. 저랑은 체질적으로 안 맞는 거 같아요."

마리에트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결국 리브리에 후작이 하는 일들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자각하고 있으니까.

"물론, 후작님께서 많이 챙겨주신다는 거 알아요. 전시회도... 저 때문에 일부러 준비해 주신 것일 테고, 일부러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귀족들을 소개해 주시는 것도요. 하지만..."

라일은 더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자신의 팔에 얹힌 마리에트의 손을 몇 번 다독였다.

"제가 배려가 부족했습니다. 저는 그저 영애의 그림을 모두가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전시회가 마무리되는 대로 벨리르로 돌아가도록 하지요."

"... 그렇게까지 하진 않으셔도 돼요. 예정된 일정은 다 마무리하셔야죠."

라일은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특유의 머스크 향이 은은하게 퍼져 나왔다.왠지, 그의 팔에 걸쳐놓은 손이 조금 뜨거워지는 듯했다.

"급한 일정은 어느 정도 마무리돼 있습니다. 영애의 컨디션이 가장 중요하지요. 일단 가시지요. 오늘은 즐기기만 하시면 됩니다."

라일이 마차의 문을 열며 에스코트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과장된 몸놀림이었다. 마치 익살스럽게 자신을 달래려는 듯.

"수도가 그렇게 나쁘기만 한 곳은 아니란 걸 보여드리겠습니다."








18화: 수도의 휴일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마리에트는 느끼고 있었다. 수도가 그렇게 나쁘기만 한 곳은 아니라는 걸.화방이 늘어선 거리에는 행인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방랑 화가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고, 어디서 온 건지도 모를 진귀한 재료로 그려낸 오묘한 색채의 그림들이 거리 곳곳에 걸려있기도 했다.광장 한가운데의 분수대의 물줄기가 흩어지며, 무지개가 피어났다.알티에라 제국의 상징인 하얀 비둘기들이 맑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새하얀 벽돌 길 위를 내달리는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마리에트는 그 풍경을 보며 웃었다.라일이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로.

"즐거우십니까?"

라일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물어왔다. 아침까지만 해도 얄미워서 주먹을 꽂아 넣고만 싶던 저 반질반질한 얼굴이, 이젠 조금 봐줄 만 하다고 느낀 마리에트가 활기차게 대꾸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수도에는 정말 신기한 게 많아요! 이 그림, 대체 뭐로 그린 걸까요? 오일 파스텔?"

움직이기가 불편한 드레스를 입고 있으면서, 어쩜 저렇게 활기차게 뛰어다닐 수 있는 건지.라일은 그녀가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모양새가, 정말로 갈색 토끼를 보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라일은 사용인에게 저 그림을 그린 재료를 구해오라 명하고는 넓은 보폭으로 마리에트의 뒤를 쫓았다.

"영애, 그러다 넘어지십니다."

저 앞에서 뽈뽈 거리며 뛰어다니던 마리에트가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곧이어 홱, 몸을 돌리고는 라일을 올려다보았다.그 시선이 꽤 뜨거워, 라일의 목덜미가 살짝 달아올랐다.

"그놈의 영애, 영애. 그냥 이름으로 부르면 안 돼요?"

"... 이름으로, 말입니까?"

이 여자, 지금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자각은 있는 건가? 장성한 귀족 남녀가 서로를 이름으로 부른다니.그건... 연인 사이에서도 낯부끄러운 일이지 않은가.

"듣기 불편해 죽겠다구요. 영애, 영애.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집까지 나왔는데!"

"하지만, 영애... 장성한 남녀가 어찌..."

라일이 난감한 표정으로 완곡한 거절의 의사를 표하자, 마리에트는 그 뜨거운 시선을 거두고는 에휴하며 한숨을 내뱉었다.

"됐어요. 그게 그렇게 힘들면 그냥 로지에 양이라고 부르시던지요."

"그러지요."

그녀는 미련도 없이 돌아서서 다시 주변에 널린 화방들의 유리창을 들여다보며 눈을 빛냈다.라일은 왠지 모르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부드럽게 주먹을 쥐고 있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모른 척하고 불러볼 것을.그는 고개를 저었다. 잘한 것이다. 귀족으로서의 품위와 예를 지킨 것이다. 그깟 호칭 하나에 연연해선 안 된다.

"... 로지에 양, 혼자 다니다간 길 잃습니다."

그녀는 지치지도 않는지, 쉴 새 없이 움직였다.방랑 화가들의 앞에 털썩 주저앉아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하질 않나, 자그마한 목각 인형들을 구매하기도 했다.일전의 로빈 블랙우드 전시회에서도 그녀는 꽤 기뻐했지만, 뭐라고 할까. 지금의 그녀가 훨씬 더...

"후작님, 이것 좀 보세요!"

생기 넘쳐 보였다.쨍한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그녀의 갈색 머리칼도, 에메랄드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도. 그가 지금까지 봐온 그 어떤 모습보다 더 활기차 보였다.아름다웠다.수도에 올라온 후로는 줄곧 병든 새처럼 지친 얼굴만 보이던 그녀가, 이제야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 예."

기분이 묘했다. 분명 나는 그녀에게 부족한 것 없이 모든 걸 제공하고 있는데. 왜 이깟 작은 나무 조각 따위에 더 행복해하는 건지.라일은 마리에트의 성화에 못 이겨 함께 작은 소품들을 판매하는 가게에 들어갔다.가게 내부가 너무 좁아, 기골이 장대한 라일이 매대 사이를 지나다니는 것조차 쉽지 않은 매장이었다.

"이것 좀 보세요. 예쁘지 않은가요?"

마리에트는 그 자그마한 소품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집어 라일에게 보였다.소재를 알 수 없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넥타이핀. 섬세한 양각이 새겨진 물건이었다.

"... 섬세하군요."

"그렇죠?"

그녀는 라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넥타이핀을 들고 가게 주인에게 가, 값을 치렀다.그러고는 터벅터벅 걸어와 라일에게 그 넥타이핀을 건넸다.

"이건...?"

라일이 그것을 받아 드는 것을 망설이자, 마리에트는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 답례에요. 오늘 즐거웠거든요. 물론... 후작님이 제게 주신 것들만큼의 가치는 없는 물건이겠지만요. 봐주세요. 제 주머니 사정이 마땅치 않아서."

혼란스러웠다. 분명, 원래의 자신이라면 코웃음을 치고 이 작은 넥타이핀을 내던져버렸을지도 모르겠다.'가치가 없는 것'이니까.어려웠다. 제가 그녀에게 그 어떤 선물을 주든지, 지금 이 작은 넥타이핀을 받아 드는 것만큼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그가 주춤거리고 있자, 마리에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그리곤 까치발을 들고, 제 넥타이에 직접 핀을 꽂으려 들었다.

"가만히 계세요. 저도 이런 건 처음이라... 혹시라도 찔릴 수도 있으니까요."

라일의 온몸이 얼어붙었다. 아니, 사고마저 얼어붙어 버린 것만 같았다.제 너른 가슴팍에 닿아오는 그녀의 숨결이, 그 작은 손의 온기가. 퍽 당황스러웠다.손을 꼼지락거릴 때마다 찰랑이는 그녀의 머리칼에서 풍겨오는 은은한 햇빛의 냄새가 정신을 차릴 수 없게 했다.그리고, 그제야 라일은 깨달았다.자신이 마리에트를 보며 느꼈던 그 복잡한 감정의 정체를.그녀의 투박한 그림과 조각을 보며 어째서 심장이 뛰었는지, 그녀의 입에서 다른 사내의 이름이 나오는 것에 어째서 그토록 불쾌한 기분이 들었는지.그녀를, 왜 나의 새장에 가두고 싶었는지.단순히 그녀의 자유만을 갈망한 것이 아니었다.그는, 라일 리브리에는.그녀를, 마리에트 로지에를.연모하고 있었다.코끝이, 그녀의 머리칼이 닿아온 셔츠 위가, 혹여나 까치발을 든 그녀가 넘어질까 안절부절못하는 손끝이, 간지러웠다.

"자, 다 됐어요."

그녀가 할 일을 마치고 멀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 참, 아름답습니다."

라일은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는 제가 선물한 넥타이핀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 에이, 후작님께서 제게 주신 것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걸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제 곁을 지나치며 이야기했다.

"이제, 돌아가요. 전시회 준비... 마저 해야죠."

라일은 그대로 멈춰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고개를 숙인 채로.

"... 후작님?"

의아한 마리에트가 재차 그를 부르자, 그제야 라일은 정신이 든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돌아가시죠."

*

저택에 돌아온 마리에트는, 다시 조용해졌다. 낮에 본 그 모습은 마치 한낮의 꿈이기라도 했던 것처럼.그 모습에 라일은 묘한 패배감을 느꼈다.저택이 불편한가? 그렇게 웃을 줄 아는 여인이, 어째서 내 저택에만 오면 목각 인형처럼 변한단 말인가.

"오늘은 쉬십시오. 오랜만에 외출이라, 꽤 피로하셨을 테니."

라일은 마리에트를 방문 앞까지 에스코트한 후,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왔다.제 가슴팍에 닿아오던 그 작은 손의 촉감이, 쫑알거릴 때마다 느껴지던 그 숨결이.후각을 자극하던 그녀의 냄새가.아직도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그는 그 길고 곧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선물을 만지작거렸다.차고, 딱딱하다. 양각은 섬세했으나 마감이 어설퍼, 삐죽하게 튀어나온 부분에 손이 찔려 피가 배어 나온다.그는 손끝에 맺힌 핏방울을 바라봤다.

"내가, 연모한다. 마리에트 로지에를."

입 밖으로 자신의 감정을 내뱉자, 이제까지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그를 집어삼킨다.이제는 확실해졌다.나는 그녀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마리에트가 침대 위로 몸을 던진다.

"... 왜 그랬지. 진짜."

그녀는 소품 가게에서의 일을 떠올렸다.평소와 달리 불규칙한 호흡, 빨갛게 달아오른 목덜미. 그리고...빠르게 뛰던 심장 박동.대체 어쩌자고, 리브리에 후작에게 그런 싸구려 넥타이핀을 선물하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직접 꽂아주는 미친 짓을 했지.그가 내게 품고 있는 감정을 알고 있으면서도. 대체 왜.오랜만에 기분이 좋은 나머지 잠깐 미치기라도 했나?

"... 아으으으!"

그녀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곤 발길질을 해댄다.그렇게 한참을 자신의 행동에 후회하고 있는데, 창밖에서 작게 똑똑 소리가 들려왔다.

"음?"

마리에트는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켰다.이 늦은 시간에 누가 창문 밖에서? 아니, 그보다 여긴 2층인데?도둑이라도 들려는 걸까?그녀는 조심스럽게 창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염려하던 도둑은 존재하지 않았다.새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창가에 앉아 창문을 부리로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깃털도 깔끔하게 정돈된 것이, 주인이 있는 새인 것 같은데... 그리고 무엇보다, 발목에 끈으로 묶은 종이 하나가 달려있었다.이게 말로만 듣던 전서구인가?마리에트는 조심스레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새는 아무런 경계심 없이 그녀의 손가락 위로 올라와 머리를 비벼댔다.

"어머, 너 애교가 많구나?"

마리에트는 새의 발목에 묶여있는 끈을 풀었다.왠지 모르게 두근거렸다. 전서구를 통해 편지를 주고받는다니. 어릴 적 읽었던 소설 속에나 나오는 일이었는데!편지지 맨 윗줄에는 아주 세련된 필체로, 익숙한 이름이 적혀있었다.

'친애하는 라일라 데레스테가.'








19화: 밀회


'친애하는 마리에트에게.'

정갈하고 세련된 필체로 시작된 편지의 내용은 퍽 충격적인 것이었다.

'저예요. 라일라 데레스테. 갑작스러운 편지에 놀랐겠지요. 실례인 것을 알지만, 리브리에 후작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선 이 방법뿐이었답니다.'

라일라가, 왜 이런 야심한 시간에?마리에트는 눈을 비비곤 편지를 마저 읽어 내려갔다.편지를 가져온 새가 혹여나 차가운 밤바람에 춥기라도 할까, 손수건을 곱게 접어 깔아 그 위에 올려주었다.

'마리에트, 그대는 리브리에 후작을 얼마나 믿고 있나요?'

그다음 문장을 보는 순간. 외면하고 있던 것들이 떠올랐다.이상하리만치 자신에게 관대한 리브리에 후작.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품고 있는 감정.모르는 체하기에는 너무도 투명하고 노골적으로 내비치는 욕망.

'아무래도,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니까...'

나는 그를 믿고 있는 걸까? 심장 한편이 꽉 막혀왔다. 저녁에 먹은 음식이 소화가 잘되지 않는 걸까.마리에트는 조금 침울해진 얼굴로, 다시 편지지로 눈을 돌렸다.

'제가 이전에 말한 적이 있지요. 그대가 자유로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부러웠다고.'

그랬었지.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에.마리에트는 그녀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영롱하게 반짝이던 그녀의 백금발, 빠져들 것만 같던 그 푸른 눈동자. 산뜻한 목소리와 그 해사한 미소.그리고, 자신을 향해 내밀어준 그 작고 고운 손.마리에트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의 그 자유를 지켜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 저 또한 진정한 자유를 얻고자 합니다.'

그 의중을 쉬이 알 수 없는 문장이었으나, 그 행간에서 자신을 향한 호의와 진심이 느껴졌다.그녀는 과연, 자신의 약혼자에 대한 무엇을 알고 있는 걸까.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신을 위해 전서구까지 보내 가며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내일 오후, 사용인을 보내겠습니다. 리브리에 후작에게는 제가 잘 이야기 해둘 터이니, 그를 따라 제가 있는 곳으로 와주세요.'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두려웠다. 어쩌면,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었을 균열들을 인지하는 것이.그것을 인지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무너져 내릴까 봐.

'당신의 반짝임을 사랑하는, 라일라 데레스테가. 우정과 존경을 담아.'

'추신, 다 읽은 편지는 전서구의 발목에 묶어 다시 돌려보내 주세요.'

마리에트는 조금 착잡하고, 두려운 심정으로 전서구의 발목에 조심스레 끈을 묶었다.내일이 오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거대한 저택과 그 주인이 품고 있을 비밀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궁금하기도 했다.톡, 톡.전서구가 창문을 부리로 두드렸다. 마리에트는 조심스레 창문을 열어 새를 날려 보냈다.은빛으로 떠오른 달 아래로, 새하얀 비둘기가 날아간다.깊은 밤의 비밀과 근심을 떠안고.

*

불편한 밤이었다. 사실 수도에 온 이후로 단 하루도 편안한 밤을 보낸 적이 없기는 했다만, 그중에서도 가장 불편하고 불쾌한 밤을 보냈다.난방이 강했는지 밤새 식은땀에 젖어 온몸이 끈적거렸으며, 머리가 지끈거려 몸을 뒤척일 때마다 골이 울려댔다.저택은 과하게 고요한 탓에 제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 잠자리가 불편하셨나 봐요."

얼마나 안색이 좋지 않았으면, 방을 정돈하고 아침 식사를 챙기기 위해 들어온 하녀장이 안쓰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안부를 물어올 정도였다.

"괜찮아요. 컨디션이 조금 좋지 않았을 뿐이에요."

마리에트는 손을 내저었다.입맛이 돌지 않아, 하녀장이 가져온 음식을 도로 물리고 주스 한잔을 간신히 삼켜냈다.마리에트는 푹 한숨을 내쉬며 작업을 할 때 입는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앞치마를 둘러멨다.라일라가 보낼 사용인이 오기 전까지, 전시회에 걸 그림을 그릴 요량이었다.여전히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요즘 마리에트는 쉴 틈이 없었다. 누구도 자신을 재촉하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전시회를 앞두고 마음이 급해지고 있었다.

"... 이게 맞는 걸까."

그 사실에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그림을 그리는 일이 이렇게 괴로웠던 적이 있던가. 내가 귀족의 직위를 버리면서까지 그리고 싶었던 그림이, 이런 게 맞았나.필립을 돕고자 후작의 후원을 받아들일 때부터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괴로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필립은 잘 지내고 있을까?'

마리에트는 마지막으로 봤던 필립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을 피하던 그 아이의 겁먹은 얼굴과 떨리는 목소리.알리야와 종종 편지를 주고받으며 필립의 안부를 물었지만, 알리야는 이상하리만치 그에 대한 답을 주지 않았다.마리에트는 혹여 제가 필립에게 실수한 게 있는지 되짚어 봤다.작업을 하겠다고 캔버스 앞에 앉아놓고, 막상 붓칠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 으으으, 짜증 나!"

마리에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었다.높이 올려묶은 머리가 엉망이 되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팔레트 위에서 굳어 갈라진 물감들처럼, 제 마음도 퍼석해진 것만 같았다.똑똑.누군가 작업실의 문을 두드렸다.

"... 네, 들어오세요."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 오늘 데레스테 영애와 약속이 있으시다고요."

리브리에 후작이 문틀에 기대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요즘 들어 그가 작업 중에는 잘 찾아오지 않아, 드레스를 입지 않은 채로 만나는 건 꽤 오랜만이라 그럴까.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 네."

"작업은 잘 되어가십니까."

그는 텅 빈 캔버스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어왔다.다 알면서, 뭘 물어? 마리에트는 갑자기 울컥 짜증이 올라왔다. 자존심이 상했다. 작업복까지 갖춰 입어놓고, 선 하나 제대로 긋지 못한 꼴을 보이다니.물론, 티를 내지는 않았다.

"뭐, 보시는 대로요."

"퀀가 잘 안풀리시나보군요. 이럴 땐 기분 전환을 하는 것도 방법이지요."

리브리에 후작이 으레 지어 보이는 특유의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그가 위압적이고 부드러운 발걸음으로 제게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마리에트의 심장도 함께 요동쳤다.쿵. 쾅.

"데레스테 영애는 밝고 쾌활하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겁니다."

그가 그 길고 곧은 손으로, 마리에트의 머리칼을 어루만진다.그의 손목에서 풍겨오는 짙은 머스크 향에 머리가 아파온다.

"그나저나... 안색이 좋지 않은 듯한데, 간밤에 잠을 설치셨습니까."

"... 조금요."

"어제 이부자리를 채비한 메이드를 해고해야겠군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그의 말에, 마리에트는 귀를 의심했다.내가 잠을 조금 설쳤기로서니, 그거 때문에 애꿎은 메이드를 해고한다니?원래 이렇게 막무가내인 사람이었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야, 제 귀한... 손님께서 제 저택에서 잠을 설치셨으니, 그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제발 그러지 마세요. 그저 제 컨디션이 안 좋았을 뿐이에요. 제가 잠을 좀 설쳤다고, 애꿎은 메이드가 일자리를 잃어서는 안 된다구요."

그는 끝내 마리에트의 호소에는 답하지 않았다.

"...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그저 헝클어진 마리에트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정돈해 주고는, 다시 우아하게 발걸음을 돌려 작업실을 빠져나갔다.마리에트는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눈을 꼭 감았다.코끝에 남은 잔향에, 머리가 어지러웠다.창밖을 보니, 그림자가 짧아지고 있었다. 곧 라일라의 사용인이 올테니, 나갈 채비를 해야지.마리에트는 심호흡을 했다.마치 전장에 나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마리에트 로지에 영애, 모시러 왔습니다."

채비를 마치고 방문을 나서자, 라일라가 보낸 사용인이 도착해있었다.앞머리는 눈을 전부 가릴 정도로 길었고, 굉장히 어눌한 발음으로 제국어를 하는 체구가 작은 남자였다.마리에트의 채비를 도운 메이드조차 미심쩍은 얼굴로 그를 바라봤지만, 마리에트는 개의치 않고 그를 따라갔다.

"제 팔을 잡고 올라가시지요."

그는 어눌한 말투와는 상반되게, 굉장히 능숙한 귀족 예법을 구사하며 마리에트를 에스코트했다.

'... 발음이나 어조를 봐서는 외국인 같은데, 의외로 알티에라의 예법에 익숙해 보이네.'

마리에트는 의아하면서도 그저 데레스테 가문에서 사용인으로 일할 정도이니 당연히 몸에 배어있는 습관이겠거니,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라일라가 보낸 마차에 올라타자, 마부가 조심스레 말을 몰기 시작했다.리브리에의 마차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아늑하고 편안한 마차였다.마리에트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아무렇게 자라난 벨리르의 나무들과는 달리, 말끔히 정리된 가로수들.구불구불한 벨리르 강과는 달리 곧게 정돈된 물길. 피는 시기와 색채를 모두 고려해 심어놓은 고급 품종의 꽃들.참 어여쁘지만, 작위적인 풍경이었다.마리에트는 한치의 오차 없이 꾸며진 그 경관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덜커덩, 그리고 짧게 들려오는 말의 울음소리.마차가 멈춰 섰다.

"조심히 내리십시오."

이전까지 어눌한 말투로 말하던 사용인이, 능숙한 제국어와 산뜻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마리에트가 조금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자, 그는 덥수룩한 갈색 머리를 매만지는 듯싶더니 홱, 벗어던졌다.그리고 차르르, 흘러내리는 백금발 머리칼과... 더벅머리에 감춰져 있던 아기자기한 이목구비.

"... 라일라?!"







20화: 진실



"라일라?! 이게 대체 무슨... 어떻게 된 거예요? 그 분장은 또 뭐고?"

장난스럽게 웃어 보인 그녀가 흘러내린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헝클어트리며 대답했다.

"저희 집안의 사용인들은, 영 믿을 수가 없어서 말이에요. 다 저희 아버지의 사람들이니까. 들키지 않고 마리에트와 접촉하려면 이 수밖에 없었어요."

그녀는 사뭇 심통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꽤 즐거워 보였다. 그녀는 입고 있는 시종복의 소매로 얼굴을 벅벅 문질러 부러 퍼석해 보이는 피부를 연출한 화장을 지워냈다.

그 여린 피부가 거친 소맷자락에 문대지며 피부가 불그스름해졌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불거진 그 피부가 라일라를 한층 매력적으로 보여주는 듯도 했다.

"일단 들어가요. 누추하지만, 여기에 초대한 건 마리에트가 처음이랍니다."

마리에트는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도 한복판의 정갈한 풍경과는 달리 아무렇게나 자라 있는 초목들과 포장되지 않은 흙길. 아무래도 저택에서 꽤 떨어진 곳까지 온 것 같았다.

수도 외곽의 숲길에 위치한 작은 오두막. 마치 벨리르에 위치한 자신의 아틀리에가 생각나는 풍경이었다. 

마리에트는 조금 그리운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 작고, 아늑한 자신만의 보금자리. 그곳을 떠나온 지가 벌써 몇 주나 지났다니. 

'... 밥때만 되면 찾아오던 그 고양이는 잘 있을까?'

마리에트는 라일라의 안내를 받아 오두막의 문턱을 넘었다.

자신의 아틀리에가 떠오르던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아주 깔끔하고... 텅 비어있었다.

조금 당황한 자신의 표정을 읽었는지, 라일라가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 너무 휑하죠? 사실 급하게 장소를 마련하느라, 저도 이제 두 번째 와보거든요."

귀족이란 양반들은, 대체 금전감각이 어떻게 돼먹은 거야?

'아무리 작은 오두막이라지만, 적어도 5파운드는 될 텐데.'

물론 저도 귀족 출신이었지만... 적어도 자신은 벨리르에 몇 년간 혼자 살며 서민적인 씀씀이를 가지게 되었으니, 이런 귀족들의 낭비벽에 쉬이 적응이 되질 않았다.

라일라는 마리에트를 텅 빈 오두막 한가운데에 마련된 테이블로 안내했다.

"죄송해요. 차라도 내오면 좋을 것을."

"죄송하긴요. 아침에 이미 차를 마신 참이에요."

마리에트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잔뜩 긴장해서 식사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는데, 라일라와 함께 있으니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그나저나, 정말 놀랐답니다. 그… 편지 말이에요.”

마리에트가 조심스레 운을 띄우자, 라일라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 저도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까, 망설여지네요.”

그녀가 품속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마리에트는 의아했지만, 일단 봉투를 받아 들었다. 봉투는 꽤 두툼했다.

“이게…?”

“일단 보시는 게 이해가 빠를 거예요.”

마리에트는 떨리는 손으로 봉투의 끝을 잡았다. 내가 지금 이 봉투를 연다면, 나는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과연 무엇을 모르고 있었고, 무엇을 외면하고 있었을까.

마리에트가 숨을 골랐다. 지이익—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오두막에 울려 퍼졌다. 찢어진 봉투 안에는 몇 장의 서류와, 사진이 들어있었다.

“이건…?”

“… 당신의 친구, 필립에게 지급된 위로금과 합의금 내역이 기록된 서류— 그리고….”

마리에트는 혼란스러웠다. 필립에게 이만한 돈이 지급될 일이 뭐가 있다고? 마차 사고 때문인가? 하지만 그것 때문이라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 지급됐다. 30파운드라니?

“그와, 리브리에 후작이 나눈… 비밀 유지 서약서랍니다. 사본일 뿐이지만요.”

마리에트는 떨리는 손으로 거래 내역서를 넘기고 뒷장을 읽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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