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늘하지만 따스한 품.
나를 품에 안은 사람은 체온의 냉기를 상냥함으로 극복하고 있었다.
S급 푹신함과 흔들리지 않는 승차감은 분명—
“일어나셨나요?”
“……엘리제베트님.”
여태 어르신을 탈것으로 이용하고 있단 것에서 죄책감이 휘몰아쳤다. 다급히 내려오려는데, 나를 안고 있던 팔 힘이 더 강해진다.
“거의 다 왔는데……. 기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모시면 안 되려나요?”
“차라리 제가 업을까요?”
“후훗, 농담도 참.”
농담 아닌데.
“미러, 제가 문제 하나 내도 괜찮을까요?”
엘리제베트의 목소리가 조금 서글프다.
요즘 나 때문에 사람을 못 죽여서 그런 걸까.
“지금이 몇 시일 것 같나요?”
“어……”
엘리제베트의 머리 뒤의 하늘은 어둑했다. 깜깜하니까 밤이라는 걸 추정할 뿐, 그 이상의 정보는 없었다.
“인천 특별시?”
“……0시 6분이에요. 한 번만 더 그런 농담을 한다면, 재미없을 줄 알아요.”
…아저씨들은 좋아하던데, 고대 흡혈귀에겐 안 먹히나 보다.
‘잠깐, 하루가 지났다고?’
할머니가 평소에 좋아 죽던 콧소리를 내었다.
“새, 생신 축하—”
“생일. 생일이라고 하세요. 죽고 싶지 않다면.”
“넵. 생일 축하드립니다. 언니.”
레비아탄에게 맡긴 편지는 집 가서 바로 태워야겠다.
“……고마워요.”
엘리제베트는 눈을 샐쭉하게 뜨다가도 금방 원래의 여유 있는 모습으로 돌아갔다.
“미러. 생일 선물 겸해서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어……선물이라면 제가—”
“혹시 그 크레파스로 쓴 낙서를 말하는 거라면 생각 잘하고 말하세요. 할머니한테 드리려던 걸 저한테 잘못 보낸 건 아닌지.”
레비아탄 이 새끼.
내가 직접 드린다니까, 그새 전달했구나!
“그 낙서를 제 생일 선물이라고 준비한 건 아니겠죠? 제 애완견이 착각한 것이 맞겠지요?”
……나름 무지개 색으로 열심히 작성한 손 편지가 낙서 취급 당했다. 하지만 나는 슬프지 않다.
“넵. 저는 따로 준비하던 것이 있습니다.”
생존했으니까.
죽는 것보다야, 내 그림이 폄하되는 편이 더 낫지.
아무래도 옛날 사람이라 보는 눈이 구식일 터.
너른 아량으로 이해 가능하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미리 ‘벌’ 주기를 잘했네요. 정말이지, 멍청한 개는 손이 많이 가서 불편하다니까요. 그냥 처분하고 새로 구할까요?”
“…저는 레비아탄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싹싹한 친구더라고요.”
녀석은 알까? 내가 방금 살려줬다는 걸.
은혜 갚는 건 기대하지도 않으니, 츤츤대지만 않으면 좋겠다.
“……그래요? 더 마음에 안 드네.”
뭐야. 변호했더니 역효과가 났다.
미안하다, 레비아탄. 나는 최선을 다했다.
“이런 나쁜 년을 봤나. 바로 ‘체포’하시죠.”
그래도 살 사람은 살아야지.
“뭐, 미러가 마음에 든다니 봐줄게요.”
“헤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이야기가 옆으로 새잖아요. 역시 처분해야 되나?”
엘리제베트는 살벌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가 말을 이었다.
“제 부탁 들어주실 거죠?”
“음… 검토 후에 최대한 긍정적으로 고려—”
“듣자 하니, 낙서. 제 ‘생신’ 선물이라면서요?”
“뭐든 말씀하시죠.”
엘리제베트가 한숨을 뱉었다.
“할 말은 많지만… 됐어요. 오늘은 기쁜 날이니까요.”
“그, 그렇죠. 오늘은 엘리제베트—”
“먼저 첫 번째. 오늘 하루, 존댓말 금지.”
“네……?”
“네는 존댓말이잖아요.”
“어…….”
“그리고 저는 당신을 언니라고 부를 거예요. 미러 언니, 잘 이해하셨을까요?”
치매인가……?
하긴, 오래 살았으니까 슬슬 올 때도 됐네.
흡혈귀를 받아줄 요양병원이 있으려나—
“만약 치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오늘 하루 종일 둘이서 오붓하게 보낼 줄 알아요.”
“……절대 안 했습, 안 했어.”
“그렇다고 쳐 드리죠. ‘언니’.”
“…….”
“다음은 두 번째.”
두 번째?
아하, 아까 첫 번째라 했으니까 두 번째도 있겠구나.
설마 세 번째도 있는 건 아니겠지…?
“저를 엘이라고 불러주세요.”
“아, 그런 설정? 완벽히 이해했어.”
어르신께서 버튜버 RP 비슷한 플레이를 즐기고 싶으셨던 거구나!
젊은이들 유행에 따려 가시려는 노력이 갸륵하다.
“이따가 나이, 종족, 국적 그런 설정들 다 적어서 보내줘. 오늘은 언니가 엘 하고 싶은 거 다 해줄게.”
“……정말 든든한 말이네요.”
꽈악, 엘의 손톱이 내 옷을 파고들었다.
무어라 불평 못 할 정도로 절묘한 세기로 누르는 것이, 과연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솜씨다.
“마지막, 세 번째.”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도대체 뜸 들이면서까지 무슨 부탁을 하려는 지 감이 안 잡힌다.
“오늘은 저만 바라보세요.”
하루 정도는 욕심을 부려도 괜찮냐는 말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을 지배하는 흡혈귀도,
중원을 몰락시킨 혈마도 아닌,
순수한 소녀의 부탁.
“응.”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
엘은 우리 집 현관문 앞에 도착해서야 나를 내려주었다.
“아침에 다시 오겠습니다, 언니.”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니, 엘은 우아하게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쿵.
현관문이 닫히고 엘의 모습이 사라졌다.
나는 불을 켜지도 않고 엘이 사준 108평 펜트하우스의 침실로 걸어갔다.
거기서 엘이 사준 이태리 원목으로 만든 침대에 누워 생각하는데.
‘도대체 뭐지?’
천마야 나를 흑운검으로 착각해서 그렇다 치자.
왜 추산불가 연령의 흡혈귀가 천마와 똑같은 눈으로 나를 보는 걸까.
‘어린이 애호가——’
는 아니다. 쭉쭉체조 수업의 개설 목적은 어디까지나 나를 놀리기 위해서.
수업 내내, 엘은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2026.03.06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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