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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계약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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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J
4화무료 4화
자유 연재 | 글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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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간 계약직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지방대 국문과 졸업생 박서인은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한 달 안에 결혼 상대를 찾아야 하는 의과대학 교수 한정수의 '가짜 아내' 제안을 받는다. 철저한 비즈니스 계약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서로의 상처를 마주하며 진정한 사랑으로 변해가고, 결국 한근태 이사장의 집요한 협박과 폭로 위협을 함께 맞서며 서로를 구원하는 '종신 정규직' 사랑으로 거듭난다. 혜성대학교 계약직 조교 박서인은 불안정한 고용 상태와 낮은 사회적 지위 속에서 어머니의 병비를 감당하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한정수는 외모, 경제력, 능력을 갖춘 엘리트이지만 아버지 한근태 이사장의 가정폭력과 통제 아래 감정을 잃어버린 채 살아간다. 두 사람은 정수의 아버지가 강요한 '한 달 안에 결혼할 상대를 데려오라'는 명령으로 인해 만나게 되고, 정수는 자신과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서인에게 2년간의 계약 결혼을 제안한다.

#현대#계약관계#사내연애#복수#트라우마#성장물#드라마#사이다물#치유물#동료/케미#갑을관계

1화

 

“여긴가.”

 

혜성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 서인은 의과대학 건물 4층 복도 끝 한 연구실 앞에 멈춰 섰다.

 

숨을 몰아쉴 때마다 폐 속 깊숙이 스며드는 것은 그녀의 사무실이 있는 인문대 건물의 눅눅한 책 냄새나 곰팡이 섞인 서류 향이 아니었다.

 

소독약과 서늘한 에어컨 바람,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뒤섞인 의과대학 특유의 건조하고 무미건조한 공기가 서인을 감쌌다.

 

같은 학교 안에 있지만 이곳은 전혀 다른 법도가 지배하는 행성처럼 느껴졌다.

 

인문대에서는 교수들의 비위를 맞추며 ‘선생님’ 소리를 듣는 게 일상이었지만, 이곳 의과대학 복도를 지나가는 이들의 눈빛은 서인을 마치 길을 잘못 든 불청객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혜성대 조교 1개월 차.

 

그녀에게 이곳은 대학이라기보다 거대한 권력의 피라미드 같았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서 있는 문 너머에는 그 피라미드의 최상층에서 군림하는 인물이 있었다.

 

혜성대병원의 황태자이자 모든 여학생의 선망을 한 몸에 받는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한정수.

 

문 앞에 붙은 그의 명패는 방금 소독을 마친 메스처럼 날카롭고 서늘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문 주위로는 학생들이 남기고 간 포스트잇이 형형색색으로 붙어 있었지만, 그것은 다정한 소통의 흔적이라기보다 닿을 수 없는 절대적인 우상에게 바치는 제물이나 기도문처럼 보였다.

 

‘교수님, 이번 학기 강의 정말 최고였어요. 제 인생의 전환점입니다.’ ‘교수님 얼굴만 봐도 마음의 병이 치유되는 기분이에요. 사랑합니다.’

 

서인은 포스트잇에 적힌 간절한 문구들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누군가에게는 구원과 치유의 상징인 그가 자신에게는 업무시간 중에 무례한 호출을 감행한 상위 포식자일 뿐이었으니까.

 

서인은 핸드폰을 들어 다시 한번 정수가 보낸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박서인 조교님. 의과대학 한정수입니다. 오늘 오후 2시, 제 연구실로 와주십시오. 국문과 학과장님께는 이미 양해를 구해두었습니다. 업무시간인 것을 알고 있으니, 늦지 않게 와주시길 바랍니다.]

 

협조를 구하는 형식의 일방적인 통보.

 

특히 학과장에게 미리 손을 써두었다는 대목에서는 이 남자가 가진 보이지 않는 권력의 크기가 느껴졌다.

 

‘양해’라는 단어는 아마도 거절할 수 없는 ‘지시’에 가까웠을 것이다. 혜성대학교 이사장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은 인문대 학과장조차 굽실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했으니까.

 

서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단정하게 묶은 머리카락을 한 번 더 정리했다. 그리고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문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생각보다 훨씬 낮고 서늘했다.

 

마치 공간의 온도를 단번에 영하로 떨어뜨리는 듯한 묵직한 무게감이었다.

 

서인은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가장 먼저 서인을 맞이한 것은 고소하면서도 진한 커피 향이었다.

 

연구실 안은 기묘할 정도로 어두웠다.

 

커다란 통창에는 짙은 색 블라인드가 촘촘하게 내려져 있었고, 그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날카로운 오후의 햇살이 정수의 책상을 칼로 베어낸 듯 일직선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정수는 그 빛과 어둠의 경계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조상봇’의 실물은 독보적이었다.

 

하지만 서인의 눈에 먼저 들어온 건 그의 눈부신 기럭지나 새하얀 의사 가운이 아니었다.

 

짙은 눈썹 아래 자리 잡은 무심하고 날카로운 눈빛, 그리고 서류를 넘기는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었다.

 

의사 특유의 관찰력과 상대를 압도하는 기운이 공간 전체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지막하게 입을 뗐다.

 

“거기 계속 서서 내 얼굴이나 감상할 겁니까? 관람료는 감당이 안 되실 텐데. 좀 비싸서요.”

 

첫마디부터가 치명적인 비수였다.

 

서인은 당혹감에 헛기침을 하며 정수가 가리킨 가죽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의자는 몸이 푹 꺼질 정도로 부드럽고 고급스러웠지만, 서인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지 못한 채 꼿꼿하게 허리를 세웠다.

 

마치 면접장에 선 수험생처럼, 혹은 도살장에 끌려온 짐승처럼.

 

“안녕하세요, 국문과 박서인 조교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박 조교님에 대한 조사는 이미 끝났으니까요.”

 

정수는 마시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달그락거리는 작은 세라믹 소음마저도 연구실의 무거운 정적 속에서는 천둥소리처럼 크게 메아리쳤다.

 

그는 통성명이나 통속적인 명함 교환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검은색 가죽 폴더 하나를 책상 너머로 천천히 밀어냈다.

 

“서론은 생략하죠. 박 조교님, 지금 1년짜리 한시적 계약직이죠? 1년 뒤면 또 구직 사이트나 뒤져야 하는 미래가 담보되지 않은 삶.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인 삶 말입니다.”

 

서인은 당황한 마음을 숨기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방대 국문과 출신, 5년의 피 말리는 취업 전선 끝에 겨우 얻은 건 재계약조차 불투명한 혜성대 조교 자리였다.

 

그 초라한 현실을 이 남자는 수술 부위를 절개하듯 정확하고 잔인하게 짚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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