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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연재 | 글링
대륙 최강의 용사 파티는 용사를 잃었다. 아니 버렸다. 용사파티의 용사이자 유일한 검사였던 레온 폴론은 마왕을 상대로 수명 50년을 불살랐다. 그 결과... 마왕은 도주했다. 동료들은 그를 역적으로 고발하고 사라졌다. 레온이 깨어났을 때 남은 것은 낯선 소녀의 몸뚱이와, 전 인류의 역적이라는 낙인뿐이었다. 선택지는 하나였다. 죽은 레온 폴론 대신, 대륙 최강의 마법사 상아탑주의 유일한 제자 레나 폴론으로 살아가는 것.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수명이 다하기 전에 마왕을 끝내고, 배신한 전 동료들의 진실을 밝히는 것. 남은 수명은 길어야 5년. 할 일은 산더미같이 쌓여 있다.
대륙을 수천, 수백 년간 유린해온 마왕군과 그 정점에 선 마왕. 그리고 그 재앙을 막기 위해 세기마다 여신의 기적을 품고 태어난 자들, 용사 파티.
이번에야말로 마왕의 목을 치리라고, 전 대륙이 추앙하고 왕실이 지원하며 신전이 온 마음을 다해 기도했다.
신궁 아르덴.
무한의 엘리스.
죽지만 않았다면 무엇이든 살려내는 성녀 시엘.
그리고 검신이자 용사, 레온 폴론.
그 네 사람이 마왕과 마주했다.
뭐, 결과는 각자의 상상에 맡기겠다.
"제길…… 저걸 인간이 이길 수 있는 건가?"
아르덴은 마왕이 내지른 첫 일격에 갈비뼈 서너 개가 박살 났다. 신궁이라는 거창한 칭호가 무색하게,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벽면에 처박혔다.
엘리스는 무리하게 결계를 펼치다 마력 폭주를 일으키며 쓰러졌다. '무한'이라는 별호가 대체 어디서 붙은 것인지 나중에 꼭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
성녀 시엘은 꽤 버텼다. 셋 중에는 가장 오래. 하지만 마왕의 농밀한 마기에 직격당한 뒤로는 그저 가느다란 숨만 붙어 있는 처지가 되었다.
그나마 사지가 멀쩡히 붙어 서 있는 건 나 하나뿐이었다.
용사 파티 최후의 모습치고는 참혹하기 그지없었으나, 나 역시 이런 전개는 예상치 못했다.
마왕은 강했다.
그냥 강한 게 아니었다. 우리가 지금껏 쓰러뜨려 온 마장군들, 사령술사들, 고대 드래곤까지. 그것들 전부를 한데 모아 으깨 버린 무언가가 옥좌에서 일어난 순간, 나는 직감했다. 이건 싸움이 아니라 재해다. 대화도, 협상도, 허점을 노린 기습도 통하지 않는다. 그저 일방적으로 부서지거나, 아니면 더 강한 힘으로 찍어 눌러야만 한다.
인류가 수백 년 동안 마왕을 죽이지 못한 이유를 나는 그 순간 비로소 이해했다.
"늘 있던 일이니까."
나는 무너진 기둥 뒤로 셋을 차례로 끌어다 놓았다. 울컥 쏟아지는 피를 삼키며 억지로 한 명씩 옮겼다. 사실 그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있었다. 마왕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내 마나 한 방울이 얼마나 절실한지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아직은 동료라는 이름의 감정이 조금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이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하아."
왼팔은 이미 감각이 소실되었고, 오른쪽 옆구리는 마왕의 손톱에 긁혀 선혈이 끊임없이 배어 나왔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장기 어딘가에서 둔탁한 통증이 울려 퍼졌다.
그럼에도 멈출 생각은 없었다.
마왕은 옥좌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았다. 흥미도, 분노도 없는 무미건조한 시선. 그저 성가신 파리 한 마리가 주변을 맴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차라리 불같이 화라도 내줬다면 싸우는 보람이라도 있었을 텐데.
그 오만한 눈빛이 되레 내 자존심을 긁었다.
이미 마나는 바닥을 드러내 더 이상의 변칙적인 공격은 불가능했다. 성 입구에서 이곳까지 뚫고 들어오며 소모한 마력을 계산하면, 남은 건 고작 서너 번의 검격뿐이었다.
마왕의 숨통을 끊기엔 턱없이 모자란 수치였다.
"방법은 하나뿐이군."
나는 내면에서 들끓는 신성을 쥐어짜 냈다. 용사로서 부여받은 신의 축복 중, 절대로 손대지 말라 배웠던 금기.
수명 소각.
남은 잔여 수명을 마나로 치환하여 신력의 위력을 한계 너머로 끌어올리는 극단의 술법이었다. 신전에서는 이 술법을 한 번이라도 발동하면 수명이 마나처럼 타버려 결코 멈출 수 없다고 경고했다.
"뭐, 이미 늦었지만."
파티원들을 살려내느라 이미 10년 치 이상의 수명을 태워버린 상태였다.
10년이 어떤 무게인지, 나는 안다. 술식을 처음 쓴 날 밤, 손끝이 검게 타들어 가는 것을 보며 신전의 노신관이 울었다. 네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성인이 되는 걸 볼 수 있는 시간이라고. 용사란 이름 아래 그 10년을 아무렇지 않게 써버린 내가 비정한 건지, 아니면 그냥 익숙해진 건지는 이제 구분이 안 됐다.
여기서 얼마나 더 태워야 할까.
나는 잠시 고민했다. 고민이라 해봤자 3초도 되지 않는 짧은 찰나였다.
50년 정도면 충분하겠지.
50년이면 평범한 사람이 청춘을 보내고, 사랑하고, 늙어가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평범한 삶 같은 건 그림에 그려본 적이 없었다. 용사가 마왕을 잡고 태평하게 천수를 누리는 모습 따위,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수명 50년쯤이야 승리를 위한 덤이라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생각해보면 참 대책 없는 놈이었다, 나도.
나는 삐딱하게 미소 지으며 술식을 전개했다.
뼛속까지 타들어 가는 지독한 작열감이 온몸을 휩쓸었다. 신력이 폭발적으로 증폭되며 손끝이 검게 탔다. 어금니가 부서질 듯 갈리고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발아래 석조 바닥이 굉음과 함께 균열을 일으키며 무너져 내렸다.
그제야 마왕의 표정이 변했다. 그 무감각한 눈에서 처음으로 무언가가 스쳤다. 흥미도 공포도 아닌, 짐승이 진짜 위협을 감지했을 때의 날것의 경계심. 놈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거면 충분했다.
나는 내 모든 것을 그 일격에 쏟아부었다.
***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비릿한 혈향이었다.
"커헉……!"
울컥 쏟아진 선혈이 바닥을 적셨다. 무너져가는 마왕성과 텅 빈 옥좌가 흐릿한 시야에 들어왔다.
"이걸 도망쳐……?"
역사 제일의 천재검사이자 심지어 전성기를 달리던 레온이 공양한 50년은 마왕을 순간적으로 압도할 정도의 기량을 보였다. 끝을 낸다면 동귀어진이라도 가능했을 터였다. 거의 다 잡았다고 확신했는데, 생명의 위협을 느낀 마왕은 중상을 입은 채 자취를 감춰버렸다.
수명 50년을 불태워 얻은 결과가 고작 마왕의 도주라니.
나는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이 내려앉은 잔해 사이로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보였다. 구름은 한가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대륙의 운명을 건 결전이 끝난 하늘치고는 너무도 평화로웠다.
빌어먹을, 살아 있긴 하네.
하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저 묘한 허탈감이 전신을 감쌌다.
'일단 돌아가자. 놈들한테 자랑이나 좀 해볼...'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던 나는 움직임을 멈췄다.
이상했다. 지면을 짚는 감각이, 힘을 주는 근육의 움직임이 평소와 달랐다. 손목에 닿는 잔해의 무게감과 피부로 느껴지는 바닥의 온도가 전부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나는 몇 번인가 눈을 깜빡이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손이 작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나는 손을 들어 눈앞에 가져다 댔다. 손가락은 마디마디가 가늘었고, 손목은 부러질 듯 유약했다. 어린 시절에도 이토록 가녀린 몸이었던 적은 없었다. 전체적으로 무언가 거대한 물리적 변화가 일어났음이 분명했다. 나는 떨리는 시선으로 거울 대신 고인 웅덩이를 찾았다.
흑색 머리칼이 사락, 하고 어깨 너머로 흘러내렸다.
길이가 예사롭지 않았다.
"……뭐지?"
목소리마저 이질적이었다. 내가 알던 굵직한 저음이 아니었다. 훨씬 얇고 투명한 미성이었다. 짧은 한마디를 뱉었을 뿐인데 고막이 멍해질 정도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가슴팍을 더듬었다.
"……."
손끝에 닿는 생소한 볼륨감에 사고가 정지했다. 천천히 시선을 내리자, 용사의 육체에는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될 곡선이 옷감 너머로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게 뭐야……?"
몸이 바뀌었다.
그것도 성별 자체가 뒤바뀔 만큼 완전히.
"……하?"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이가 없으면 웃음부터 나온다는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근처의 웅덩이로 기어갔다. 두 팔로 잔해를 짚으며 겨우 몸을 옮겼다. 멀쩡한 몸이었다면 단 두 걸음이면 닿았을 거리였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빗물이 고인 웅덩이 앞에 무릎을 꿇고 수면을 응시했다.
낯선 소녀의 얼굴이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칠흑 같은 머리칼에 루비처럼 붉게 빛나는 눈동자. 날카로운 기백으로 무엇이든 베어 넘길 것 같던 용사 레온 폴론의 인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고 아주 생소한 얼굴도 아니었다.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여리여리한, 그야말로 미소녀의 모습이었다.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비벼 보았다.
하지만 수면에 비친 환영이 달라지는 기적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뺨을 세게 꼬집었다.
"아!"
꿈이 아니었다. 지독할 정도로 선명한 현실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었다. 무너진 마왕성의 잔해 한가운데서, 작고 낯선 내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며 상황을 정리했다.
마왕을 잡으려 했다.
수명 50년을 태웠다.
그 부작용으로 몸이 바뀌었다.
그런데 마왕은 죽지도 않았다.
"……하아, 미치겠군."
2026.06.05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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