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크 키리엘. 남들은 다 하는 2서클 마법조차 몇년이 걸린, 최악의 둔재. 그런 재능으로, 마침내 한 지방의 기사단장 자리에 오른, 노력의 천재.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것은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어린시절, 마을을 몰살한 마족에게 복수하기 위해 전장으로 가는것. "최전선에서는 7서클 이상만 싸울 수 있습니다." 그것만을 보고 달려온 그에게 세상과 재능은 아직 약하다며 막아섰으니까. "...커헉!" 그리고 어느날, 갑작스럽게 마을에 나타난 괴수들. 7, 8서클의 강자도 맞서기 버거운 상대. 그럼에도 마크는 무기를 들었다. 처음부터 이길 수 없을 싸움. 그저 사람들이 도망칠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기 위한 발악. 그 발악도 점차 끝나가고 있었다. 그때. 괴수들의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눈이 시리도록 찬란한 빛. 급하게 내던진, 마법보다 마력에 더 가까운 공격. 그것에 저 괴수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장님!!" 분명, 이곳에 왔으면 안됐을 텐데. 몇년 전 습격을 받은 마을에서 직접 구했던, 벨 알레라는 소녀. 줄곧 함께 싸우고 싶어했지만, 늘 기사단에 남아야 했던 소녀. 그랬던 그녀의 손에서 뿜어지는 마나가 괴수들을 증발시키고 있었다. 주변을 가득 메운 마력 너머로 마크는 무언가를 느꼈다 깊게 준동하는, 10개의 마나로 이루어진 고리.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방금 떠오른 감정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쓰러진 괴물 너머, 황급히 마크를 도와주러 손을 뻗는 벨을 바라보며, 그의 마음속에 열등감은 이름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사람이, 자신인것도 모른 채로.
[마나.]
['가장 작은(Minimum)' 이란 말을 어원으로 삼는 이것은, 세상의 모든것을 구성한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마나를 감지하고 분해할 수 있으며, 이를 자신의 뜻대로 재구성할 수 있다. 단순히 실체가 있는것뿐 아니라.....]
벨은 소리가 나게 책을 덮었다. 빽빽한 내용이 글자가 아니라 사각형 덩어리로 보일 지경이었다.
"하아..."
오늘 새벽, 마을을 습격한 하늘을 가릴 듯 거대한 마족.
아직 전장에 나서선 안될 벨이 소리를 듣고 나갔는데도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모두 그것과 싸우고 있었으니까.
쓰러진 기사들 사이로, 마족의 촉수가 기사단장에게 기울었고,
"단장님-!!"
그 이후의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얗게 번지던 시야. 머릿속을 파고드는 어떤 목소리. 그리고.
손에서 쏘아진 마나가 빛으로 변해, 그것을 산산히 조각내는 순간.
모두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던 때, 황급히 단장을 일으킨 것.
그리고 벨을 똑바로 바라보던 그가 한 말.
"그래.... 이정도면 정식으로 기사가 되어도 되겠어."
어딘가 혼란스러운 듯, 누구에게 하는건지도 모를 말을 뱉은 그는 사람들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떻게.
아직 전장에 나가는것도 허락되지 않은 벨이,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을 벌일 수 있었을까.
이미 수십번 읽어 익숙한 마나 이론을 찾아보며 답을 구하려 했지만, 복잡한 마음에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벨 알레, 단장님께서 부르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겔 안젤로. 벨과 비슷하게 단장님을 동경해서 기사단에 온 남자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미겔은 정식으로 기사가 되었고, 벨은 기사단에서 막내 내지는 깍두기 역할이라는 점.
다들 힘든 일은 시키지 않고 잘 대해 주지만, 아직 벨은 정식 기사가 되기엔 모자랐다.
오늘 새벽까지는.
"금방 나가요."
"축하해. 그렇게 기사가 되고 싶어했었는데. 그 마물 어떻게 쓰러트렸는지, 나중에 꼭 들려줘야해?"
"일단 단장님께 가볼게요. 저도 확실치가 않아서..."
잠시 후 도착한 단장실 앞.
숨을 깊게 들이마쉬고,
문을 두드린다.
"...벨 알레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문을 연다.
마크 키리엘.
그들이 자리잡은 이 지역, 아샤의 기사단장이자
반쯤 공포에 사로잡힌 채 처음 아샤에 온 벨을 보살펴 주었던 인물.
벨이 오기 전까지 마나 운용을 다듬고 있던 것인지 방 곳곳에 희미한 빛이 맺혀있었고, 방 한쪽에 걸려있어야 할 갑옷은 어쩐지 마크가 입고 있었다.
오랜 시간 아샤에서 수많은 작전을 지휘해 본 인물답게 크고 건장한 체격. 마주친 사람을 꿰뚫어보는듯한 검은 눈.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숨기며 마크의 앞에 서자, 그의 입이 열렸다.
"오셨군요, 벨 알레."
...뭐지? 갑자기 존댓말을?
"오늘 새벽, 마을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마족을 단독으로 처치했었죠."
"....네, 맞습니다."
평소와 전혀 다른, 딱딱하다 못해 옅게 날이 선 목소리.
"다른 기사들 뿐만 아니라 기사단장인 저조차 고전하던 적을 일격에 무찌른 점을 높게 사, 저는 당신을 기사단에 정식으로 들이기로 했습니다."
"....."
단순히 존댓말뿐이 아니라 미묘하게 달라진 말투에 벨이 어쩔 줄 모르고 서있는 사이, 마크가 작게 웃었다.
"그냥 농담한번 해본....건 아니고, 원래 기사단장이 기사를 임명하는건 공식적인 의식이니까."
"네?"
"임명은 내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진행될 예정이지만, 원래 임명되기 전에 이렇게 직접 불러서 소식을 전해줘. 너처럼 큰 공을 세워서 기사가 되는 사람도 있지만, 꾸준히 노력해서 자격을 갖춘 사람도 있거든."
그럼, 방금은...
"뭐, 네가 조금 당황하는것도 나름 재미있긴 했어."
"단장님-!"
방 밖까지 소리가 들릴까봐 소리 지르는 시늉만 했다.
"그렇게까지 화낼만한 일인가, 이게... 아무튼 축하해. 목표를 잡은지 3년만에, 결국 기사가 됐네."
"하아.... 그것도 어떻게 보면, 다 단장님 덕분이죠."
5년 전,벨의 마을은 마나 생명체들의 습격을 받았다.
집도, 익숙하던 풍경도 모두 무너지고 불타고 있었다.
숨어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다 자취를 감추었고, 마침내 벨의 차례가 된듯, 크고 날카로운 그림자가 그녀의 머리 위에 드리웠다.
그때 그 그림자를 가르며 나타난 사람. 여전히 벨은 그 순간을 잊지 못했다.
달려오는 기사들의 갑옷이 내는 소음.
마나가 재구성되며 흘러나오는 빛.
기사들이 가는곳마다 터져나오는 마물들의 비명.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손을 뻗던, 마크 키리엘.
하지만 그날 기사들에게 구원받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벨을 포함해서 고작해야 몇명.
그중 할줄 아는것도 없이 습격으로 홀로 남게 된 벨은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었다.
그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 마크였다.
기사단의 방 하나를 내어주고, 악몽에 떨며 비명을 지를 때마다 늘 찾아와주던 사람.
기사단에 머무르며 아픈 기억은 서서히 아물었지만, 여전히 벨은 무엇을 할 지 모른 채 아샤를 떠돌고 있었다. 기사단의 일을 나서서 도와주는정도가 벨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기사단 몇몇과 벨을 데리고 간 마크가 기사단장 임명을 받고 돌아오던 날.
하필이면 그날, 마크가 없던 아샤는 도적들에 의해 습격을 당했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마을의 모두가 죽었을만큼. 마크 일행은 아슬아슬하게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적들에게 뛰어들었다.
다음날. 늘 하던 것처럼 갑옷들을 손질하던 벨의 가슴은 왜인지 모르게 답답했다.
평소 같았으면 순찰 중 묻은 먼지, 혹은 가끔 마주치는 괴수를 막아내다 생긴 발톱 자국 외엔 손볼 것도 없던 갑옷들이었지만.
2026.08.18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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