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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의 여름에게
에담
3화무료 3화
자유 연재 | 글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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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을 강요받던 피아니스트 유하는 손가락 사고로 재능을 잃고 절망에 빠진다. 시한부를 살아가는 도윤은 그녀의 아픔을 알아채고 남은 계절의 온기를 나누려 한다. 서로의 상처를 악보 삼아 쓰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잃어버린 음악과 남은 시간을 통해 진정한 구원과 예술의 의미를 찾아가는 잔잔한 연애의 기록이다. 독자는 두 사람의 서사 속에서 삶의 무게와 위로의 힘을 함께 느끼게 될 것이다.

#현대#시한부#첫사랑#치유물#애잔물#잔잔물#기억상실#성장물

눈이 멀 것 같은 백색 조명이 쏟아졌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거대한 콘서트홀의 정적 속에서, 열아홉 유하가 마주하는 것은 오직 건반의 서늘한 감촉뿐이었다. 손가락이 건반 위를 미끄러지듯 달릴 때마다 공기는 찬란한 선율로 부서졌고, 사람들은 그것을 천재의 재능이라 칭송했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은 오히려 날카로운 희열이 되어 유하의 전신을 감쌌다. 마지막 타건이 끝남과 동시에 터져 나오던 폭포수 같은 기립박수. 그 순간 유하는 자신이 온전한 하나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유하의 세계는 병실의 눅눅한 침대 시트 위에서 처참히 조각나 있었다.

창밖에서 매미 소리가 악을 쓰며 울려 퍼지는 무더운 여름날이었지만, 유하의 왼손에는 서늘한 감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두꺼운 깁스와 붕대에 칭칭 감긴 왼손은 마치 타인의 신체 부위를 억지로 붙여놓은 듯 생경했다. 유하는 떨리는 오른손을 뻗어 굳게 닫힌 왼손의 손가락 끝을 건드려 보았다.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뇌에서는 분명히 '움직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었지만, 신경이 끊겨버린 손가락은 그 어떤 대답도 들려주지 않았다. 사고가 나던 날의 기억은 파편화되어 머릿속을 찔러댔다. 찢어지는 듯한 타이어 마찰음, 비명, 그리고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짓눌렸던 손등의 감촉. 의사는 재활을 하면 일상생활은 가능할 것이라 말했지만, 유하에게 그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피아니스트에게 일상적인 손가락이란 죽음보다 못한 삶을 의미했다.

"유하야, 엄마 왔어. 좀 어때? 연습은 못 해도 악보는 계속 보고 있어야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엄마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서늘한 기대가 서려 있었다. 사고 이후에도 엄마는 유하의 손이 '고장 난 기계'처럼 수리될 수 있을 거라 믿는 듯했다. 유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한때 유하의 손끝에서 탄생하던 라흐마니노프의 웅장한 화음들은 이제 환청조차 들리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기괴한 정적과, 다시는 건반을 누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뿐이었다. 완벽함을 강요받던 천재의 삶에서 '완벽'을 덜어내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껍데기만 남은 육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구역질이 났다.

유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자복 소매 아래로 드러난 흉측한 붕대가 오늘따라 유난히 무거웠다. 엄마가 잠시 간호사 호출로 자리를 비운 사이, 유하는 홀린 듯 병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지나는 사람들의 활기찬 소음이 유하의 귀에는 웅웅거리는 소음으로만 치환되었다.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는 오른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숫자판의 가장 높은 곳, '옥상'이라는 글자가 유하의 눈에 박혔다.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는 악기는 폐기되어야 한다. 스스로를 도구로만 정의하며 살아온 유하에게, 연주할 수 없는 삶은 연주가 끝난 무대 뒤의 어둠보다 더 막막했다.

옥상 문을 열자 뜨거운 여름 공기가 폐부 깊숙이 밀려 들어왔다. 난간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지나치게 반짝거리고 있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유하는 천천히 난간 끝으로 다가갔다. 굳어버린 왼손을 가슴에 품은 채, 그녀는 마지막 선율을 끝내기 위해 허공을 향해 발을 내디디려 했다.

"유하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등 뒤를 날카롭게 가르는 목소리에 멈칫 발끝이 멎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숨 막히는 향수 냄새와 신경질적인 구두 굽 소리. 엄마였다. 유하는 난간을 붙잡은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심장 부근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내려와. 당장 내려오지 못해? 네가 지금 제정신이니?"

엄마의 목소리에는 딸의 목숨을 걱정하는 절박함보다, 공들여 쌓아 올린 탑이 무너질까 전전긍긍하는 장사꾼의 초조함이 섞여 있었다. 유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엄마를 바라보았다. 흐트러짐 없는 매무새, 단정하게 묶은 머리, 그리고 사고 이후 한 번도 따스한 적 없던 그 눈동자.

"엄마 눈에는 내가 안 보여요?"

"무슨 헛소리야. 너 하나 살리겠다고 내가 얼마나..."

"아니, 내 손 말고. 나 말이에요."

유하가 붕대에 감긴 왼손을 들어 올렸다. 마치 저주받은 흉물이라도 되는 양, 엄마의 미간이 순식간에 찌푸려졌다. 유하는 실소했다. 사고가 난 그날부터 엄마가 확인한 것은 유하의 안색이 아니라 수술 경과 보고서였다. 재활 가능성, 신경 회복 수치, 그리고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는 확률. 그 숫자들 속에 유하라는 인격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손으로 다시는 쇼팽을 칠 수 없대요. 엄마가 제일 좋아하던 그 완벽한 타건, 이제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요."

"의사들이 하는 말 다 믿을 거 없어. 최고 권위자를 알아보고 있으니까 넌 시키는 대로만..."

"난 악기가 아니야!"

유하의 비명이 옥상의 정적을 찢었다. 뜨거운 여름 바람이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헤집어 놓았다.

"엄마한테 나는 그냥 피아노 치는 인형이었잖아. 손가락 하나하나가 엄마의 자부심이었고,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보다 건반에서 나오는 소리가 더 중요했잖아. 그런데 이제 소리가 안 나요. 고장 났다고요. 그럼 버려야지, 왜 자꾸 고치려고만 해?"

"한유하, 너 정말 이기적이구나. 너를 위해 희생한 내 세월은 생각 안 하니? 네 아빠가 너 하나 뒷바라지하려고 어떻게 살았는데!"

익숙한 죄책감의 굴레가 목을 조여왔다. 유하는 숨이 막혀 헉 소리를 내뱉었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유하의 성취는 가족의 영광이었고, 유하의 실수는 가문의 수치였다. 열 손가락 끝에 온 가족의 생계와 명예가 매달려 있다는 사실은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무거운 저주였다.

사랑받기 위해 연주했다. 버려지지 않기 위해 완벽해져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 그 유일한 생존 수단이 사라졌다. 쓸모를 다한 도구에게 남은 것은 폐기 처분뿐이라는 사실을 유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차라리 그때 죽었어야 했어."

유하의 낮은 읊조림에 엄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분노인지 경악인지 모를 떨림이 엄마의 입술을 타고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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