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벽한 화려함 속에 추악한 진실을 숨긴 발드리아 제국. 부모님의 억울한 죽음을 목격한 소녀가 백금빛 머리카락 뒤에 칼날을 숨긴 채 황국의 총애를 얻어, 제국의 심장부에서 그가 아끼는 모든 것을 서서히 파멸시키기 시작한다.
발드리아 황성, 에메랄드 홀의 연회장은 오늘도 역겨울 만큼 찬란했다.
천장을 가득 채운 수정 샹들리에가 마력의 흐름을 타고 유려하게 일렁였다. 그 아래로 쏟아진 빛무리가 귀족들의 가식적인 미소와 화려한 보석 위에서 잘게 부서져 흩어졌다.
사치스러운 향수와 달콤한 와인 향이 뒤섞여 코끝을 찔렀다. 그러나 레나르테에게 그것은 썩어가는 시체 위에 끼얹은 분칠에 지나지 않았다.
“레나르테, 안색이 좋지 않구나. 잠시 쉬겠느냐?”
오빠 라엘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가느다란 어깨를 감싸 쥐는 손길이 지독히도 다정했다.
레나르테는 고혹적이면서도 한없이 가련해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아뇨, 오빠. 이 정도는 견뎌야죠. 오늘은 제국에서 가장 ‘축복받은’ 날이잖아요? 제가 빠지면 황태자께서도 크게 아쉬워하실 거예요.”
푸른 눈동자가 홀의 중심으로, 가장 높은 단상 위에 앉은 여인에게로 향했다.
황후 비아트리스.
레나르테의 어머니를 잔혹하게 도려내라 명령한 그 입술이, 지금은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저 목줄기를 그으면 어떤 소리가 날까.저 가식적이 얼굴, 역겨워.’
차가운 상상이 뇌리를 스쳤다. 가냘픈 손가락이 부채 밑에 숨긴 은색 단검의 자루를 스치듯 어루만졌다.
아버지 라스핀 공작이 그녀를 ‘아름다운 독’으로 길러낸 이래, 레나르테에게 연회장이란 사교의 장이 아니라 사냥터였다.
그때, 문이 거대한 소리와 함께 열리며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구둣발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울릴 때마다 사람들의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전장의 비린내를 채 가시지 못한 사내, 칼라일 제르바르크였다.
“죽은 형의 약혼녀가 이곳에 있다기에 와 보았는데.”
칼라일의 적안이 레나르테를 꿰뚫을 듯 응시했다. 사생아라는 비천한 신분을 피로 씻어내고 황태자의 자리를 찬탈한 괴물. 제1황자를 제 손으로 베고, 그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낸 오만함 앞에서 귀족들은 하나같이 숨을 죽였다.
“과연, 죽은 형님이 저승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미모로군.”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레나르테는 본능적으로 가슴 안쪽에서 치미는 마른기침을 삼켰다. 폐부 깊숙이 자리 잡은 병마가 오늘도 그녀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쓰러지는 대신 우아하게 무릎을 굽혔다.
“라스핀의 공녀, 제국의 별이신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발드리아의 영광이 전하와 함께하시길.”
“영광이라. 그 비릿한 단어는 집어치우지. 공녀, 그대의 눈은 순종을 말하고 있으나 그 끝은 나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군.”
칼라일이 그녀의 턱을 거칠게 잡아 올렸다. 서늘한 가죽 장갑의 감촉이 피부에 닿았다. 사방에서 경악 어린 숨소리가 터졌지만, 레나르테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꼬리를 나긋하게 접으며 속삭였다.
“전하, 제 눈이 그리 보이신다면… 그 또한 전하의 흥미를 끌기 위한 계략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공녀따위가 황태자의 목숨을 넘본단 말입니까.”
칼라일의 눈동자가 기묘하게 일렁였다. 고요하던 그의 세계에 처음으로 날카로운 균열이 가는 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남자가 샴페인 잔을 가볍게 흔들며 다가왔다. 라일락빛 은발이 샹들리에 빛을 받아 몽환적으로 일렁였다. 황실 마법단 부단장, 헤일린 론드미온이었다.
“아아, 전하. 우리 가여운 레이디를 너무 겁주시는 것 아닙니까? 제 친구가 겁이 많아서요.”
헤일린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칼라일과 레나르테 사이로 자연스럽게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레나르테의 손을 잡아 제 입술로 가져갔다. 예의 바른 신사의 몸짓이었으나, 그 눈동자에는 오직 레나르테만이 읽어낼 수 있는 은밀한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레나, 오늘따라 더 창백해 보이네. 은색 장신구가 잘 어울리긴 하지만, 이렇게 핏기가 없어서야 원, 내가 속상하잖아?”
낮은 속삭임이 귓가를 스쳤다. 헤일린은 레나르테의 정체를 아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그녀는 그 다정한 목소리가 가식임을 알면서도, 그가 흘리는 서늘한 마력의 온기에 잠시 몸을 기댔다.
‘헤일린, 장난은 그만둬. 지금 내 폐가 타들어 가고 있으니까.’
속으로 삼킨 말을 뒤로하고, 레나르테는 다시 황후의 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발드리아 제국. 이 화려한 금빛 감옥 속에서 그녀는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은 죽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몰고 자신을 암살자로 빚어낸 이 제국 전체를 무덤 삼아, 함께 침잠할 생각이었다.
입가에 아주 작은 핏방울이 맺혔다. 헤일린이 그것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닦아내며 웃었다.
“오늘 밤은 길 것 같네, 레나.”
손가락이 입술에 닿았다 떨어지는 순간, 레나르테는 소름 끼치도록 선명한 생의 감각을 느꼈다. 지독하게 차가우면서도 은밀한 마력의 흔적. 헤일린은 그녀의 피를 닦아낸 손가락을 제 입술에 가져다 대며 눈을 가늘게 떴다.
“맛이 아주 써, 무슨 독이라도 삼킨 거야?”
“알면 묻지 마. 네가 뿌린 향수 냄새가 더 독해.”
레나르테는 속삭이며 그의 가슴팍을 가볍게 밀어냈다.
칼라일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뒷덜미에 박혀 있었다. 사냥감을 놓치지 않으려는 포식자의 눈빛. 레나르테는 그 시선을 외면한 채 오빠 곁으로 돌아갔다. 라엘은 무심한 표정으로 와인 잔을 기울이고 있었으나, 잔의 목을 쥔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2026.07.22 20:43
2026.07.22 20:52
2026.07.22 20:52
2026.07.16 22:18
2026.07.15 15:27
2026.07.10 19:48
2026.07.09 23:25
2026.07.06 18:29
2026.07.06 00:24
2026.07.05 23:52

작가님 축하드립니다!
26.08.21

문체가 마음에 듭니다 공모전에서 좋은 결과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26.07.13
뷰컴즈 주식회사
대표 : 김학성 | 전화 : 1811-8389 | 이메일 : help@gling.co.kr
사업자 등록번호 : 492-88-01088 | 통신판매업신고번호 : 2022-서울영등포-1768
주소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당산로 171, 13층 13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