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야종과 극야종으로 나뉜 세계, 백야종들의 실험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황혼종이 되어버린 도하. 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수천년이 지난 지금, 세상을 멸망시키고 그 속에서 유일하게 웃는 황혼종이 되리라.
“어서 와, 빛을 잃은 세상에, 너희를 초대할게.“
.
.
.
세상이 멸망했다, 아주 아름답게.
잿빛으로 뒤덮인 세상에서 한 남자가 제 옷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백한 세계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은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그는 잘게 미소 지었다.
그 얼굴에는 아쉬움이라고는 담겨있지 않았다. 나직한 목소리가 폐허가 된 땅에 울려 퍼졌다.
“드디어, 멸망했다.”
…이제야 잠잠하네…
고대하던 순간이었다. 이 세상이 멸망하기를, 그리고 너희가 나타나기를.
…
지독하게도 아프고, 눈물이 나는 날들이었다.
큰 고통이 동반된 실험은, 여리고 작은 몸에 가득 침투해 붉은 자국을 내며 괴로운 상처를 만들어냈다. 피를 내뿜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온몸에 주삿바늘이 꽂히는 것도 이제는 익숙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눈앞에 점멸한 하얀 실험실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던 것이.
처음에는 무서웠다. 나와는 반대되는 하얀 옷을 입고, 마스크를 쓴 백야종(白夜種)들이 내 양팔을 붙잡은 적에.
그들은 내 앞에 감정 없는 표정을 한 채 서 있었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기계의 규칙적인 소리가. 내게서 느껴지는 불규칙적인 심장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내가 무어라 더 말하기 전에 그들 사이로 한 남자가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울려 퍼지는 구두 굽 소리가 멎고, 그 남자는 내 앞에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웃는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소름 돋았지만 동시에 아름다웠다.
그 남자는 손을 뻗어 내 턱을 들어 올렸다. 강제로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흔들리는 동공을 바라본 남자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붙잡은 내 턱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나와 눈을 맞추었다.
마치 극상의 가치를 지닌 물건을 감정하는 듯한, 지독하리만치 시리고 오만한 시선이었다.
“아주 예쁘구나, 너.”
웃는 그 모습에, 척추를 타고 오싹함이 느껴졌다. 맹독을 품은 뱀처럼, 그가 날 한입에 잡아먹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리 예쁜 네가, 극야종(極夜種)으로 남는 건, 두고 볼 수 없지.
남자는 내 턱을 거칠게 놓았다. 다정한 목소리와는 대비되는, 싸늘하고 날카로운 시선이 내게 꽂혔다.
“시작하시죠. 우리가 준비한 실험을.”
‘…실험…?’
불길했다. 앉아 있던 의자 속에서 혼자 힘으로는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탄탄한 가죽 벨트가 튀어나왔다. 익숙하다는 듯 그것들은 내 사지를 옭아매었다. 여린 동공이 흔들리며 그 속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남자는 제 엄지로 내게서 떨어지는 눈물을 훔쳐냈다. 묶여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남자의 행동을 지켜보는 것뿐. 그 이상도 그 이하의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제 엄지에 묻은 내 눈물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없이 예쁘게 접어진 눈꼬리가 오싹하면서도 시선을 둘 수 있는 사람이 저 남자밖에 없어 그를 계속 보았다. 그의 입이 벌어지며 그 속에서 붉은 혀가 드러났다. 내 눈물을 훔쳤다, 그의 혀가.
경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제 엄지에 묻은 내 눈물을 핥고 더더욱 잔인한 미소를 내게 지어 보였다. 이 남자는 정상이 아니다. 단단히 미쳐있는 사람이다. 공포감이 급속도로 몰려왔다. 온몸을 비틀며 빠져나오려 애를 써도, 아무도 내 염원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목소리가 들렸다.
“빠져나오려 애쓰지 마. 너만 힘드니까.”
다정하게도 날 걱정해 주는 목소리가 이제는, 안심되지 않았다. 오히려 겁이 났다. 정상이 아닌 이 남자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뇌에선 어떤 생각이 들어 그것을 실행으로 옮길지. 그럼에도 주시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사람밖에 없어서 우습게도 눈물을 흘리며 계속 눈을 맞추었다.
남자는 피식 웃으며 내게 손 인사만을 건넨 채 하얀 실험실을 빠져나갔다. 하얀 공간에 혼자가 된 나는, 떨리는 눈으로 이곳을 둘러보았다. 소름 끼치도록,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하얗고 깨끗했다. 그 하얀 공간에, 불청객이 들이닥치며 그 공간은 오염됐다. 아주, 아주, 붉게.
윙윙거리는 기계음 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았다. 흉측하게 생긴 기계들 속에서 뾰족한 바늘이 튀어나왔다. 내 얼굴에 걷히지 않을 그늘이 졌다. 이 바늘들이 내 살을 파고들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주 작은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이 바늘이 내 살을 파고들지 않았음을 바랐다. 하지만 그 바람은, 그 희망은, 날 버렸다.
푸욱-
“윽…! 아아악……!!!”
핏줄에 바늘이 꽂혔다.
아프다.
시야가 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눈앞에 가득 들어찬 눈물이 사정없이 밑으로 흘러내렸다.
“준비됐습니다, 소장님.”
그 남자는 건성으로 듣고는 귀찮은 듯 나른한 손길로 지시했다.
눈물이 가득 맺힌 눈으로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하얀 이곳에, 오류라도 난 듯 저 청록색의 머리칼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부터 저 청록색은 내가 혐오할 색이 되었다. 나를 아프게 하고, 또…
“그러면 주입하겠습니다.”
기계적인 목소리와 함께, 바늘과 연결된 호스를 통해 무언가가 주입되는 것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호스가 연결된 기계를 바라보았다. 백색의 액체였다.
“으윽…아아아아아악…!!!!!!”
전신을 타고 흐르는 불쾌하고 찌릿한 감각에 나는 온몸을 비틀며 저항했다. 내 거센 비명이 실험실 벽에 부딪히고 다시 튕기어 나오며 산산조각으로 찢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은, 그저 단순한 액체가 아니었다. 백색의 액체, 백야종들의 피였다.
나는 극야종(極夜種)이다. 당연하게도 백야종(白夜種)은 나와 맞지 않다. 억지로 주입되는 그들의 피는 나와는 상극으로 맞지 않아 터지는 듯한 감각이 내 온몸을 뒤덮었다.
세포가 터지는 듯한 지독한 고통에 나는 지옥 같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여기서 기절하면 기계와도 같은 백야종들이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너무 세게 문 탓에 입술을 타고 검은 피가 흘렀다. 지금은 백야종들의 피와 섞이고 있는 ‘진짜’ 내 피였다.
고통으로 시야가 흐려지고, 그 시야에서 다시 돌아오기 위해 입술에 피를 내는 것을 반복하였다. 여러 번의 고통 속에서, 턱을 괸 채 날 지켜보고 있는 그가 눈에 들어왔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입가에 미소를 잔뜩 머금은 채 날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는 씹어서 피를 낼 입술도 없었다. 너덜너덜해진 입술 끝으로 그에게 전했다.
‘…너,…내가 죽일 거야…”
남자는 눈을 반짝이더니 곧 미소를 흘렸다. 더럽게 보기 싫었다.
남자 역시, 내게 입 모양으로 전했다. 예쁘게 접어진 눈꼬리가 뱀과 같다는 생각은 끝끝내 지워지지 않은 채.
‘할 수 있으면 해봐, 꼬맹아.’
2026.07.26 23:30
2026.07.17 00:27
2026.07.13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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