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여자를 꼽으라면 모두가 같은 이름을 말할 것이다. 황후의 권세를 등에 업고 패악질을 일삼는 독부(毒婦) 황족들조차 혀를 내두르는 골칫덩어리. 한 점 수치를 모르는 포악한 맹견, 라비니 데 루체반티. 그녀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했다. 사랑하던 남자를 포기한 채 어머니가 원한 남자와 혼인했고, 어머니가 건넨 칼로 남편을 죽였고……. “자결하렴.” 어머니가 건넨 칼로 자신을 찔렀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죽였던 남편. 엔리케 데 알테사니와의 결혼식을 두 달 앞둔 아침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 한 번 죽음을 경험해보자 알 것 같았다. 자신은 어머니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고결한 사람이 아니었다. 살고 싶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이용할 수 있었다. 사랑도, 양심도, 죄책감도 전부 내던질 수 있었다. 설령, 자신이 죽였던 남자와 손을 잡아야 한다고 해도.
쓸모를 다한 사냥개는 주인의 손에 죽는다 하였다. 라비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결하렴.”
라비니는 제 앞에 놓인 칼을 가만히 응시했다. 서슬퍼런 칼날에 자수처럼 정교하게 새겨진 장미 문양이 명백한 제 것이었다.
결혼식을 치르고 남편의 영지로 떠나던 날, 어머니에게 받았던 그 칼이었다. 제 남편을 직접 찔러 죽인 물건이기도 했다.
라비니는 덜덜 떨리는 고개를 들어 어좌에 앉아있는 어머니를 응시했다.
금빛 다이아뎀을 착용한 그녀의 주변을 시녀와 기사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도망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평생을 어머니의 뜻대로 살아왔다.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라면 버렸고, 남편을 죽이라면 죽였다.
그런데도 부족했던 걸까.
제게 돌아온 건 칼 한 자루 뿐이었다. 자결하라는 말과 함께 어머니는 제 딸을 처분한 것이다.
“어떻게…….”
떨리는 입술을 겨우 움직인 라비니가 토해내듯 물었다.
“어떻게 어머니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
그녀의 어머니, 루크레치아는 품에 안은 고양이의 하얀 털을 쓰다듬으며 라비니를 바라보았다. 따스한 그 눈빛이 제게 채찍을 휘두르는 것만 같았다.
“나도 이러고 싶진 않았단다, 라비니.”
차가운 시선과 달리 루크레치아의 목소리는 따스했다. 마치 어린 아이를 나무라는 듯한 부드러운 어조였다.
“하지만 어쩌겠니. 넌 북부의 주인, 네 남편을 죽인 유력한 범인으로 지목됐지. 네가 범인이란 사실이 알려지면 넌 목숨을 잃는 것 뿐만이 아니라 알테사니 공작을 죽인 파렴치한 마녀로 역사에 기록될 거란다. 나와 네 동생들의 이름에도 먹칠을 하게 되겠지. 물론, 황실에도 말이야.”
“애초에…… 그를 죽이라고 시킨 게 어머니셨잖아요!”
있는 힘을 몽땅 쥐어짜내 소리친 라비니의 시선이 루크레치아에게 고정되었다. 형형하게 불타오르는 눈동자에서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이 카펫 위로 동그란 자국을 남겼다.
“칼을 쥐여준 건 나였지만, 휘두른 건 너였지 않니?”
곧바로 반론한 루크레치아가 턱을 괴며 다리를 꼬았다. 그 반동에 움직인 드레스 자락이 깃털처럼 가볍게 그녀의 다리를 감쌌다.
언제나 아름다운 어머니. 사소한 행동마저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어머니. 여태 자랑스럽게 여겼던 그 사실이 제 마음에 빗금을 그을 줄이야.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지만 어머니의 형상만큼은 끝내 흐릿해지지 않았다. 라비니는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난 자결을 해도 죽고, 하지 않아도 사형당하는 거잖아요! 근데 왜 이런…….”
“아니, 넌 사형당하지 않을 거야. 라비니.”
루크레치아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네가 여기서 목숨을 끊지 않는다면, 기사들이 너를 데려가 심문할 거란다. 폐하와 내가 허락했기 때문에.”
라비니는 그녀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유력한 용의자라 하여도 황녀이자 루체반티의 이름을 달고 있는 이상, 황제와 황후가 허락하지 않으면 손도 댈 수 없었다. 기껏해야 궁에 유폐시키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지금 제 어머니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나와 그는 너를 버렸다. 네겐 너를 지켜줄 친정도, 현재 네 소속이나 다름없는 시댁도 없지. 아무것도 아니게 된 황녀를 기사들이 어찌할 것 같니? 그것도 나를 닮아 우수한 외모를 가진 너를.”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끔찍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라비니는 그녀가 자결을 명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 목적이 너무나도 역겨워 입을 열 수 없었다.
“남편을 죽인 죄로 영원히 돌팔매질 당할 바엔 남편을 잃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따라 죽은 황녀가 되는 게 더 나은 결말이지 않겠니?”
루크레치아의 품에서 내려온 고양이가 라비니의 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라비니는 고양이의 기척을 눈치챌 수 없었다.
결국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라는 게 아닌가. 꼴사납게 흐느끼지 않으려고 입술을 짓이겨 막았는데도, 슬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울음이 새어나왔다.
“난 네게 기회를 주는 거야, 라비니.”
온화한 한숨을 지으며 어좌에서 일어선 루크레치아가 천천히 라비니에게로 다가왔다. 무릎을 굽혀 제 딸과 시선을 맞춘 그녀는 라비니의 드레스 자락에 몸을 비비는 고양이를 들어 안았다.
“곧 성에 불이 날 거란다. 그 안에선 새까맣게 타버린 첫째 황녀의 시체가 나오겠지.”
루크레치아는 라비니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며 마지막이 될 딸과의 만남에 끝을 맺었다.
“불에 타 죽는 것보다는 칼에 찔려 죽는 게 아프지 않을 거야. 불에 타는 건 정말이지, 끔찍한 고통이거든.”
진심으로 충고한 루크레치아가 이만 무릎을 폈다. 자신의 수족들과 함께 라비니를 스쳐 지난 그녀는 마지막으로 상체를 반쯤 돌려 라비니에게 말을 건넸다.
“사랑했단다. 라비니. 네가 내 딸로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야.”
작별 인사를 고하자 성의 문이 닫혔다. 드넓은 성에 남겨진 건 라비니와 어머니가 하사한 칼 한자루 뿐이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심장이 세게 조여드는 것 같았다. 라비니는 바닥에 이마를 파묻었다. 비참한 울부짖음이 성 안을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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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 수고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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