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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마왕성에 인간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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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늘
121화무료 5화

매주 화 목 토 연재 | 글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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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따위는 안중에도 없던 마계의 절대적 지배자, 마왕 에라멜티드 르 포르티. 그녀의 침실에, 어느 날 인간 소년이 갑자기 떨어졌다. “이게 뭔지 아느냐?” 하지만 마왕은 인간을 처음 보는 상황이었다. “황제의 자식이라고?” 황제에게 버림받고 죽음 직전까지 내몰렸던 어린 황자, 디에르안 젤렌셔 피스버르트. 마왕은 그런 소년을 이용해 오랜 꿈인 복수를 이루려 한다. 그런데 이 소년, 심상치 않은 과거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저, 저는 그럼 인질…인가요?” 꾀죄죄한 옷차림에 뼈가 튀어나온 몸, 비쩍 마른 얼굴. 게다가 황궁 호수의 판잣집에 갇혀 죽는 줄로만 알았다는데……. “그 인간. 왜 마왕성에 떨어진 거지?” 처음에는 단지 호기심이었다. 하지만 궁금증은 곧 관심이 되고, 결국 돌봐주게 된다. 마왕은 자신도 모르게 소년에게 빠져들기 시작하는데… “인질이여, 너의 운명을 뒤바꿀 시험을 줄 테니, 너와 같은 처지에 빠진 인질을 구해오라.” 마왕과 버림받은 황자의 운명을 뒤바꿀 계약이 시작되었다.

#로맨스판타지#서양풍#인외존재#성장물#복수#계약관계#먼치킨#계략녀#걸크러시#순정남#상처남#연하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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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토

-이것은 기억을 잃기 전, 한 마왕이 남긴 마지막 사랑의 비망록이다-

천지가 개벽하고, 신이 세상에 숨결을 불어넣은 이래로 마계는 단 한번도 이토록 처참하게 유린당한 적이 없었다.

믿었던 드래곤 루슬라키엘의 배신. 그가 인간들을 부추겨 일으킨 전쟁은 평화로웠던 마계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내가 책임지겠소.”

그 한마디의 파장은 지대한 파도를 불러왔다.

마계의 심장부라 불리는 심연의 회의장. 수천 년의 세월을 견뎌온 거대한 흑요석 기둥들이 위태롭게 흔들릴 만큼, 장내의 동요는 격렬했다.

“안 됩니다! 마왕님께서 물러나시다니요!”

“놈들이 원하는 게 바로 그겁니다. 루슬라키엘 그 교활한 뱀 같은 자식이 마왕님의 목을 노리고 이 판을 짠 것인데!”

장내의 모든 이들이 벌떡 일어나 그를 향해 항의를 내비쳤다. 거친 숨소리와 분노에 찬 고성이 뒤엉켜 회의장을 가득 메웠다.

그 빗발치는 반발 속에서, 누군가의 긴 한숨이 동굴의 울림처럼 굵직하게 퍼져 나갔다.

“그대들은 지긋지긋하지도 않는가.”

계단형 구조로 된 어두운 회의장, 그 안쪽이자 높은 곳. 어둠보다 더 짙은 그림자 속에 앉아 있던 초대 마왕, 론델리오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공간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이 실려 있었다. 떠들썩하던 말소리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자그마치 천 년이오. 그 사이에 황제란 것들이 수백 번 바뀌었지, 이테리온 제국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것을 지켜보았지.”

론델리오는 지친 눈으로 회의장에 모인 마족들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육신은 신이 빚어낸 최초의 걸작이라 불릴 만큼 완벽했지만, 지금은 곳곳에 붕대가 감겨 있었고 그 위로 검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배신자 루슬라키엘과의 전투에서 입은 치명상이었다.

“……론델리오 님께서 휴전 협정을 제안하면, 놈들이 분명 마왕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할 겁니다.”

한쪽에서 세 개의 뿔이 달린 거구의 악마가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의 말에 모든 장로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반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론델리오는 마계의 시조이자 모든 마족들의 아버지였다. 세상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피조물로서 신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고, 황무지였던 이 땅을 생명이 숨 쉬는 낙원으로 일구어낸 위대한 선지자였다.

정적 속에서 론델리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움직임이 버거워 보이자, 곁에 서 있던 푸른 머리칼의 악마가 재빨리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마왕님. 아직 부상이 다 낫지 않았습니다. 무리하시면…….”

“괜찮다, 체블롯. 어차피 사라질 육체, 소중히 여길 이유도 없으니.”

론델리오의 덤덤한 대답에 장내가 다시 한번 숙연해졌다. 마왕이 마왕이기를 포기한다는 것. 그것은 곧 자신의 존재 의의인 마계의 핵을 스스로 파괴하겠다는 의미였다.

소멸에 가까운 희생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그 무거운 고요함 속에서 론델리오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루슬라키엘이 인간 편에 선 이상, 우리에게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 거 아니오!”

그의 시선이 회의장 입구 쪽을 향했다. 그곳에는 곰방대를 입에 문 채 삐딱하게 서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물론, 로드께 책임을 물을 이유도 없소.”

“…….”

“로드께 자식이 한둘도 아니고 말이오. 하하.”

힘없는 웃음소리가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로드. 모든 드래곤의 아버지이자 절대자. 그는 알록달록한 마계의 생명체들 속에서 유일하게 무채색인 존재였다. 그가 가진 색은 오직 타오르는 자황색 눈동자뿐.

배신자 루슬라키엘 역시 그의 피를 이은 아들이었기에, 로드의 침묵은 더욱 무거웠다.

곰방대에서 입을 뗀 남자가 한 걸음 내디디자, 형언할 수 없는 압박감이 회의장을 덮쳤다. 공기가 납처럼 무거워졌다. 그는 제 아래에 있는 수많은 마족을 무심히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론델리오.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딸을 낳은 거냐?”

“부정은 못 하겠군. 그대도 그럴 생각으로 낳아준 거 아니오?”

두 초월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마왕은 빙긋 웃으며 먼저 눈을 돌려 장내를 둘러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회한과 자조가 뒤섞여 있었다.

“우린 모두 최선을 다했소. 인간들과 공존하려 했고, 그들의 짧은 생을 배려했지.”

“…….”

“하지만 그 대가가 이것이오. 진실을 아는 건 오직 우리뿐. 저들은 루슬라키엘에게 선동되어 칼을 겨누었고, 우리는…….”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체블롯의 부축을 뿌리쳤다. 절뚝거리는 다리로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너무 많이 사랑해서, 너무 많이 봐주었소.”

그의 탄식에 몇몇 악마들은 이를 악물었고, 감수성이 풍부한 엘프들은 소리 죽여 눈물을 흘렸다.

“그러니 신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내가, 이 모든 업보의 책임을 지는 게 맞소.”

마왕의 허탈한 웃음이 또다시 장내에 울렸다.

“뭐가 그리들 분해서 그러시오. 나의 시대가 끝난다고 해서 마계가 끝나는 것은 아니오. 후대는 내 딸, 에라멜티드가 이어받을 거요.”

그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잊히는 듯했다.

“그 아이는 악마 중에 가장 상냥하고 자애로우니, 상처 입은 마계를 치유하고 더 번성시킬 거요.”

론델리오는 마족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유언과도 같은 명령을 내렸다.

“그대들이 인간에게 핍박받거나 그들이 구속하려 들면, 내 딸이 그대들의 발톱이 되어줄 것이오. 또한 인간들과의 계약에서 우위를 점하는 법을 알려줄 것이오.”

그는 마지막으로 마계의 군대를 이끄는 뱀파이어의 수장의 이름을 불렀다.

“베르폰파스.”

검붉은 머리의 사내가 론델리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마왕의 손등에 이마를 대고,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절규하듯 말했다.

“마왕님…… 제발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이렇게 인간에게 굴욕적으로 숙일 수는 없습니다! 그들에게 삶을 가르쳐준 건 우리 마족이었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저 배은망덕한 놈들에게!”

그의 피 맺힌 호소에 회의장 내의 모든 마족이 저마다 비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맞습니다, 마왕님.”

“처음 놈들이 국경을 넘었을 때, 확실히 짓밟아버렸어야 했습니다.”

그때였다. 육중한 회의장 문이 굉음과 함께 열렸다.

찬바람과 함께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들어섰다. 장내의 모든 시선이 문 쪽으로 쏠렸다.

그녀의 등장은 마치 폭풍의 눈처럼, 소란스럽던 회의장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은색에 가까운 백금발, 심연을 담은 듯한 자색 눈동자.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입고 있는 긴 소매의 검은 드레스.

그것은 마족들에게 상복을 의미했다. 아직 마왕이 살아있는데 상복을 입고 나타났다는 것은, 이미 모든 결말을 알고 왔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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